1879年 생가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 사이의 2남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국리 491번지에서 출생, 본관은 청주, 어린시절의 이름은 유천, 호적이름은 정옥.
1905年 백담사
한용운 스님이 입산, 출가한 사찰인 백담사.
스님은 이 곳에서 승려로서의 기본과 불교사상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의 투신으로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였다.
1907年 건봉사
스님이 최초로 참선수행을 하였던 건봉사.
스님은 1902~1930년대에도 이따금 이 곳을 들러 학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고 건봉사의
사지를 편찬하였다.
1908年 유점사
4월 유점사에서 서월하에게 화엄경 배움. 5~10월 일본으로 시찰 겸 유학(임제동대학), 10월 귀국
1911年 송광사
친일불교, 식민지불교의 우호성을 갖고 있던 조동종맹약을 분쇄한 자주불교의 상징인 임제종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송광사.
스님은 이곳에서 임제동운동을 대중화시켰으며 임제종 종무원의 관장으로 추대되었다.
1912年 범어사
스님이 주주불교의 차원에서 추진한 임제종운동의 거점이었던 범어사.
전라도 사찰에서 시작한 임제종운동을 전불교계로 퍼져 나갔고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가 3본산으로
정해졌다. 범어사에는 임시 종무원이 설치되었다.
1914年 통도사
한용운 스님이 불교대중화를 위해 발간한 불교대전을 집필하였던 통도사.
스님은 이곳에서 강원 학인을 가츠리면서, 팔만대장경을 열람하여 불교대전을 집필할 수 있었다.
1917年 참선, 깨달음
오도송br />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br />
그 몇 사람 객수속에 길이 갇혀나br />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br />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br />
구도의 일념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타파한 깨달음의 증거br />
(1917. 12. 3. 오세암)
1919年 3.1운동 / 3.1독립선언, 태화관
3.1운동의 민족대표가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이 모임에 참석한 스님을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의 당위성과 일제에 체표되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함과 동시에 만세삼창을 주도하였다.
1919年 3.1운동 / 서대문형무소
한용운 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가 일제에 의해 구속되었던 서대문형무소.
스님을 이 형무소에서 일제의 회유를 의연히 뿌리치고, 우리 민족이 독립이 되어야 하는 논리를
극명하게 개시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집필하였다.
1923年 선학원
일제히 불교계의 하일거점이였던 선학원(서울 종로구 안국동).
1921년 12월 선학원을 일제 사찰령의 구속을 피하기 위한 차원에서 항일적인 승려들의 민족의식에서
창건되었다.
스님은 선학원 이곳을 주 거주처로 머무르면서 불교 자주화와 민족운동을 지속하였다.
1925年 오세암과 님의 침묵
6월 7일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 탈고, 8월 29일 [님의 침묵] 탈고
1930年 대각사
스님과 함께 민족대표로 활동한 백용선 스님이 창건한 대각사(서울 종로구 봉익동).
용성스님은 대각사를 무대로 경전번역, 식민지 불교극복, 대각교 운동을 전개하였고 만해 스님은
1930년대 초 이곳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불교강연을 하였다.
1933年 심우장
스님이 말년에 머물렀던 심우장(서울 성북동).
스님은 이 심우장을 지울 때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총독부를 마주 보지 않은 북향을
택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간악한 일제의 회유를 차단하고 민족지사들과 우국충정을 나누었다.
1944年 망우리 묘지
만해스님이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자 그 시신을 묻은 망우리 공동묘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스님은 공동묘지에 묻혀 있지만 그의 정신 및 기개가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원형이기에 이곳은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1967年 파고다공원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기 위해 파고다 공원에 세워지 용운당대선사비.
스님의 일생과 투철한 민족정신을 요약, 정리하였는데 비문은 항일승려인 이우허스님이 지었고
1967년 10월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