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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hae Prize For Peace : Lotus world (Chairman-Ven. Sung Kwan), Mother Park Chung Soo Foundation(Chairman-Park Chung Soo)
The Manhae Prize for Practice : Marianne Stoeger(Nun, nurse), Margareth Pissarek (Nun, nurse)
The Manhae Prize for Literature : Lee Mi Ja(Singer), Lee Seung Hoon(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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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만해평화대상 추천서
로터스월드(대표 성관스님), Lotus World (Ven, Sung Kwan)
로터스월드 불교계를 대표하는 국제구호활동단체다. 공식적인 창립연도는 법인 등록을 완료한 2004년이지만 활동은 2002년 캄보디아 지원 사업을 하면서 국제개발 NGO에 합류했다. ‘모든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자하는 것이 로터스월드의 비전이다. 그동안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 세 나라의 지원 활동과 국내에 들어온 난민 지원 등 4가지 사업을 해왔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캄보디아에서의 활동= 로터스월드는 2006년부터 캄보디아의 시엠레아프 외곽에 아동센터(BWC, Beau-tiful World of Cambodia)를 건립해 운영해왔다. 이곳은 기숙사와 사찰, 안과병원, 도서관, 주민 다목적센터, 게스트하우스, 스텝 하우스, 학교, 식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기숙사는 부모 없는 아동과 결손아동 70여 명의 생활·보육시설이다. 학교를 운영하는 이유는 전쟁고아를 위한 교육 목적도 있지만, 부모가 있다 해도 취학률이 높지 않은 데 대한 대응이다. 아동센터에서는 안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지역 특성상 강한 햇빛으로 안과 질환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수술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어서 실명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로터스월드는 201461천 번째 개안수술을 기록했다. 내과와 산부인과 진료도 병행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운영하는 로터스 희망미용센터는 2011년 함께 일하는 재단과 양천로터리클럽의 지원을 통해 설립된 취업기술학교다. 가난 때문에 취업 기회를 얻기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미용기술 훈련을 통해 취업 및 자립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캄보디아 아동센터는 우리나라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봉사활동 장소로도 활용된다. KT&G 복지재단, 한국과학기술대학교 봉사단, 금천구청 봉사단, 동국대 108리더스 등이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2) 미얀마에서의 활동=로터스월드는 2010년부터 아시아의 빈국 중 하나인 미얀마에서 교육시설과 위생시설 지원 사업을 펼쳐왔다. 미얀마는 교육 인프라 구축에 투자할 재원이 부족하다. 학교가 있어도 시설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매우 노후한 상태다. 위생시설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대부분 그렇듯 화장실이 부족하다. 로터스월드는 이에 착안해 화장실과 샤워실 신·개축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20147월부터는 미얀마 국경지대에 청소년센터와 동네 도서관 건립 사업을 하는 따비에와 함께 미얀마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 지원 사업 책 읽어주는 코끼리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책 읽어주는 코끼리프로젝트는 오랜 기간 출판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던 미얀마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동화책을 읽을 수 있도록 미얀마 어로 번역된 한국 동화책을 현지에서 출판하는 사업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도 미얀마 인들을 힘들게 한다. 이에 따라 식수 개발에도 나서고 있으며, ‘식수 개발목적의 후원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미얀마 지원 사업은 한국에서 파견한 활동가가 없는 관계로 현지의 NGO와의 네트워크, 현지 활동가의 교육에 중점을 둔다는 방향이다. 20136월 더프라미스, 따비에, 해외주민운동 한국위원회(KOCO) 등과 함께 미얀마를 지원하는 단체 실무자들의 모임을 구성하고 미얀마 현지 활동가 역량강화 교육을 실시했다.
3) 라오스에서의 활동= 로터스월드는 전국토의 3분지 1이 불발탄으로 뒤덮인 라오스에서 UXO(불발탄) 사고예방교육, 소외계층 교육지원, 현지활동가 교육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불발탄은 내전과 베트남전 당시 대량 투하된 확산탄(또는 집속탄)의 불발탄과 잔해가 라오스 국토의 3분의 1에 퍼져 있어서, 이로 인한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현지 불교단체인 BDP(Buddhism for Development Project)와 함께 어린이들을 위한 UXO 사고예방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BDP에 따르면, 투하된 26천만 기 중 아직도 8천만 기가 불발탄으로 산재한다. 이를 완전하게 제거하는 일은 로터스월드의 중요한 사업이다. 이밖에도 로터스월드는 라오스의 빈곤층과 UXO 희생자, 장애인, 소수민족여성 등 교육의 기회가 제한된 소외계층을 위한 학교와 도서관 건립 지원, 독서와 글쓰기 교육, 직업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로터스월드의 라오스 지부는 현지 활동가들이 모여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4) 국내에 와있는 난민지원 활동= 한국에 와 있는 난민의 수는 35백 명가량으로 파악된다. 난민으로 인정되면 자국인과 동일한 권리가 주어지지만, 언어와 문화 차이로 취업과 자녀교육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는 빈곤을 재생산한다. 로터스월드는 김포에 거주하고 있는 70여 명의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머 난민을 돕고 있다. 성인 컴퓨터 교실, 아동 멘토링과 결연사업을 진행 중이다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로터스월드는 20138월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로부터 특별협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동안의 활동성과를 국제기구에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로터스월드는 지금까지의 활동보다 앞으로의 활동에 더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창립 이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성관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아직은 부족한 점과 개선해야 할 점이 많지만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눔을 실천하고자 뜻을 내신 후원자 여러분의 경책과 격려를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오늘보다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정진하겠습니다.”
2016년 제20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소감
로터스월드 이사장 성관 스님-Lotus World (Ven.Sung Kwan) 
한 번은 세상에 와서 산 것처럼 살아보리라다짐하며 지나온 세월이 어느덧 한 갑자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날이 언제쯤일지 내 자신에게 묻지만 대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래도 한 번은 세상에 와서 산 것처럼 살아보리라는 굳은 맹세는 변함이 없습니다. 138억 년 전 빅뱅에 의한 우주의 탄생, 45억 년 전 지구의 탄생, 그리고 40억 년 전 생명의 탄생. 나는 우주의 신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거룩한 한 생명체입니다. 지금은 비록 개미처럼 사는 한 낱 미세한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사는 현상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에 무한하고 온전한 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나는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생명의 탯줄을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런 존재로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될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평등과 평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 존재하는 평등과 평화는 거짓가까운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하는 많은 이들과 평등과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실천하려 했지만 부끄럽게도 너무 미흡했습니다.
이 번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만해대상 평화부문 공동 수상을 계기로 만해스님의 실천적 삶을 미력하나마 계승하기 위하여 더욱 용맹 정진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만해대상 평화부문 공동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어려운 고비마다 저에게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고 함께해 준 모든 분들께 이 상을 드립니다. 
2016. 8. 12
로터스월드 이사장 성관 돈수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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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만해평화대상 추천서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교무)- Mother Park Chung Soo Foundation (Park Chung Soo)
박청수 교무는 동남아와 네팔 등지에서 마더 박으로 불린다.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자신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박 교무를 현지인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박 교무는 지금까지 전세계 55개국에 105억원을 모금해 전했다. 그 결과는 국내외 학교 9, 병원 2개로 나타났다. 벌써 10년 전 현역에서 은퇴한 원로 교무이지만 그는 지금도 2000년 설립한 청수나눔실천회를 통해 자신이 지원해온 기관에 애프터서비스를 하고 있다. 1937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박 교무는 독실한 원불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특히 어린 두 딸에게 시집, 그까짓 시집 무엇하러 갈 것이냐? 다른 길이 있는 줄을 모르면 몰라도,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무엇하러 시집을 갈 것이냐?”며 원불교 성직자인 교무가 될 것을 권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잡가서 하는 살림은 작은 살림이요, 교무가 되는 것은 큰살림으로 여겼던 박 교무는 전주여고를 졸업한 후 19살의 나이로 자연스럽게 원광대로 진학하고 전북 익산 월불교 중앙총부로 출가해 교무가 됐다.젊은 시절부터 박 교무는 원불교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았다. 사직교당을 개척한 후 1960년대 말부터 땅콩장사를 벌여 방위성금을 내는 것을 비롯해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애썼다. 이웃종교와의 관계는 경기 의왕의 한센인 가톨릭시설인 성라자로마을과의 인연이 대표적이다. 1975년 성라자로마을 축성식 때부터 박 교무는 따로 부르는 사람이 없어도 성라자로마을을 매년 찾아왔다. 돈이 생기면 돈을 들고, 돈이 없으면 떡, , 수박, 참깨, 들깨, 무말랭이까지 들고 갔다. 그리고 거기서 한센인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놀다가 돌아왔다. 성라자로마을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40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통 큰 지원을 하는 독지가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성라자로마을 한센인들은 박 교무를 그 누구보다 친근한 친구로 여긴다.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박 교무의 큰살림이 외국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1988년부터이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도덕재무장운동(MRA) 국제대회에서 우연히 캄보디아 청년지도자를 만난 것이 인연이었다. 그 청년으로부터 오랜 내전으로 인해 캄보디아 국민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전해 들은 그는 당장 100만원을 마련해 전해줬다. 1994년엔 프놈펜 외곽에 고아원에 건립을 지원했고, 1995~96년엔 캄보디아 북서부 바탐방 지역의 지뢰제거 사업에 11만 달러를 보탰고, 슬리퍼 5만 켤레와 의류 15만점을 보냈다. 2003년엔 바탐방지역에 무료구제병원을 설립했다. 그뿐 아니라 지난 2007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조의금을 모아 바탐방에 어머니의 이름을 딴 원불교 교당을 짓기도 했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의 라다크 지역과의 인연도 시작은 작았다. 1991년 인도 방갈로르를 방문한 박 교무는 라다크에서 유학온 학생들을 만났다. 1년의 절반은 눈과 얼음에 갇혀 지내는 히말라야 해발 3600미터 오지(奧地) 라다크 학생들은 몇 년째 집에 다녀오지 못했다고 호소했다. 박 교무는 즉시 움직였다. 이듬해 라다크에 마하보디기숙학교를 완공했다. 기숙학교의 첫 입학생은 여학생 25. 현재는 초중고교 500여명이 집과 가족을 떠나지 않고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병원과 양로원도 지었다. 그의 이런 활동은 대부분 즉흥적이다. 눈으로 보고, 직접 호소를 듣고 꼭 필요하고, 자신이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면 결정한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늘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박 교무 활동의 특징은 회의(會議) 없이그리고 뻔뻔스럽게 그러나 밉지는 않게이다.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면 바로 결정하고, 그 후엔 주변에 모든 인연을 동원해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지원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런 박 교무를 밉지 않게 본이들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를 비롯한 원불교 교도들뿐 아니다. 법정 스님, 박완서 작가 등이 기꺼이 자신의 원고료를 박 교무에게 내어줬다. 그리고 그런 후원은 인도, 캄보디아, 케냐, 에티오피아 등 전세계로 전해졌다. 국내에서도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등으로 결실을 맺었다. 박 교무는 자서전에서 한평생,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나는 쉼 없이 길쌈을 했던 여인 같다고 했다. “의미 있는 일, 필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면 나는 아무 일이나 가리지 않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하나하나의 일마다 애가 타고 애간장이 녹는 지경에 이르러야 일이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박 교무는 자신이 이뤄온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은 정비례합니다. 먼저 자신이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은 저절로 몰려옵니다.” 그는 지금도 사람을 만나면 종이 한 장을 쓱 내민다. ‘청수나눔실천회후원 신청서다. “아직도 제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아요라면서
2016년 제20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소감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교무) - Mother Park Chung Soo Foundation (Park Chung Soo)
만해 상을 수상하게 되어 너무도 영광스럽고 기쁩니다. 만해는 그분의 혼을 본받고 싶은 어른이고, 너나없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이십니다. 만해는 선각자이시고 애국자이고 계몽가이십니다. 그리고 능력으로는 무한 동력의 위력을 간직하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전에는 3·1 독립만세를 부른 33인 중의 한분이시고, <님의 침묵> 시를 쓰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읽지 못했던 한용운 평전을 이제 읽어보았습니다. <님의 침묵>에서 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님은 중생이고 국민이고 겨레이고 나라라고 합니다. 만해의 일생은 오직 그 님을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며 살아오신 큰 보살이십니다. 그러다 심신이 지치면 오세암과 백담사를 찾아들지만 그곳에서 잠시 기운을 챙기면 그 산 좋고 물 맑은 청정지역을 벗어나 또 다시 혼잡하고 시끄럽고 어려운 일이 산적한 도심 서울로 와서 민중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혁신의 길, 바른길로 인도하려 하여도 모두가 잘 따르지만은 않았던 그 힘겹고 쉽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또 중생들의 한 복판에 서 계시곤 하셨습니다. 특히 말과 글과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3·1 독립만세의 선봉에 서 계셨고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만해 선생님이 살아오신 길은 가시밭길이었고,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을 살피면 그 많은 일들은 한사람이 한 평생을 바쳐도 그 한가지의 일도 이루기 어려운 일들을 해내셨습니다.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그것이 겨레를 위한 지름길이라 믿고, 통도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영인본 1,5116,802권을 열람, 대장경의 중요 내용을 뽑아 일반대중들에게 불교의 정수를 전하기 위해 불교대전(佛敎大典)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대장경은 승려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에게는 더더욱 그 양의 방대함과 난해성 때문에 점근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불교대전(佛敎大典)에 인용된 경전의 권수만도 444권에 달하고 8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활동이었습니다. 만해는 불교대전(佛敎大典)뿐 아니라 조선불교 유신론, 정선 강의 채근담도 저술했습니다. 만해는 매사에 집중력이 뛰어나고 하는 일마다 역동적이어서 한사람이 일생을 바쳐 애써도 이룰 수 없는 많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이제 저도 수상자로서 만해의 평화 정신을 기리고 본받아 실천궁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6.7.4. 박청수
마리안느 수녀.jpg마가레트 수녀1.jpg
 
2016 만해실천대상 추천서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 & 마가레트 피사레크(Margareth Pissarek) 수녀 (소록도의 천사)
예부터 우리나라에선 의료인들조차 눈길도 주지 않은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천시와 멸시를 받으며 소록도란 작은 섬에 격리되어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 갈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먼 이국에서 온 두 명의 수녀가 그들을 따스하게 끌어안으며 그들이 그 동안 받아온 천시와 멸시를 눈처럼 녹여주었습니다. 이 두 명의 수녀가 바로 마리안느(Marianne Stoeger, 82)와 마가렛(Margreth Pissarek, 81) 수녀님이십니다. 1960년대 유럽 오스트리아 인스브룩(Innsbruck)에서 간호대학을 갓 졸업한 20대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들은 한국이란 나라에 한센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있으며, 간호사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머나먼 한국이란 나라에 오셨습니다. 한국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고흥, 고흥에서도 배를 타고 가야하는 작은 섬, 소록도. 소록도에 도착한 두 분께서는 그분들의 일생을 한센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녀들이 소록도에 처음 가서 마주한 한센인들은 의료인들조차 직접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보단 간접적으로 치료하거나 심지어 외부에 노출되지 못하고 소록도란 작은 섬에 격리되어야 했었습니다. 그러한 한센인들의 삶은 끝나지 않은 고통과 상실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에게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들의 행동은 달랐습니다. 의료인들 조차 접촉을 기피하던 한센인들에게 두 수녀분들은 맨손으로 피고름을 짜내거나 상처를 하나하나 소독해주었습니다. 또 그들을 마주해서는 안 되는 금기시되는 환자들이 아닌 평범한 환자, 고칠 수 있는 환자로 대하셨습니다. 그들이 건내준 사과, 그 사과에는 그들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고름과 각질 등이 묻어있음에도 그녀들은 기꺼이 그 사과를 베어 물었습니다. 한센인들의 상처를 치료하거나 수술을 할 경우 그들의 피가 자기 얼굴이나 몸에 튀어와 묻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마치 친가족처럼, 친형제처럼, 보통사람들이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들을 이 두 분께서 해오셨습니다. 이 두 분의 숭고하고 헌신한 봉사활동은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센병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한센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녀들의 활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지원은 모두 한센인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각 병동마다 목욕탕을 설치하였고 결핵병동을 새로 지었으며, 많은 건축물을 신축하여 한센인들이 쾌적한 환경에 투병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한센인들이 사용하는 의약품이나 위생용품은 물론 생필품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물품을 지원받으면 지원받는 그대로 한센인들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녀들은 한센인들에게 받기만 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일어나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삶을 주었습니다. 한센인들이 투병을 마치고 사회에 정착해 나갈 수 있는 사회 정착자금을 주는 등 그들이 사회에 복귀하여 정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녀들의 이러한 모습은 많은 한센인들에게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잘 구사하던 그녀들은 먼 이국 땅에서 온 봉사자가 아닌 바로 옆집에 사는 할머니와 닮았습니다. 그녀들을 할매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이 두명의 할매는 그들 자신에게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녀들의 방에는 그 흔한 TV도 없었고, 오직 그녀들의 옷을 담을 수 있는 조그마한 장롱이 전부였습니다. 한센인들에 베푼 숭고한 인간애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두 명의 수녀들의 활동은 소록도에 해마다 전국에서 온 의료봉사단과 자원봉사단을 불러들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소록도를 자원봉사 천국으로 알려지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보상을 받거나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렸습니다. 국내외 언론들이 수없이 소록도를 찾아 그녀들의 활동을 알리려고 하였지만 인터뷰는커녕 사진 한 장도 찍지 못한 채 돌아간 게 부지기수였습니다. 수많은 감사장과 공로패가 전달되었지만 되돌려졌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어느날 갑자기 소록도를 떠났습니다. 20대에 한국에 들어와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센인들만 돌보다보니 어느새 자신들이 70대 노인이 되어버렸고, 그런 늙은 자신들이 소록도 사람들에게 짐이 될까봐 이별의 아픔을 주기 싫어 말없이 떠난다는 편지 한 장만을 남겨 놓은 채 2005년 오스트리아로 출국하셨습니다. 현재 안타깝게도 마리안느 수녀님은 암 투병 중이시며, 마가렛 수녀님은 치매로 요양원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녀들께서는 결코 소록도를 잊지 않은 채 소록도에서 지낸 사진을 꺼내며 그곳에서 지내었던 생활을 그리워하십니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소록도는 사회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 조차할 수 없는 격리와 단절의 공간이었습니다. 아픔을 간직한 곳인 소록도에 찾아온 천사이자 햇빛이었던 그녀들은 소록도를 변화시켰습니다. 소록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회는 이젠 소록도를 향해 활짝 열어졌으며, 그 곳에서 살아가는 한센인들은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가 생겼습니다. “소록도를 대한민국 복지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 그녀들의 작은 소망처럼 지금 소록도는 자원봉사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봉사의 참된 정신과 숭고한 정신을 가르쳐주는 공간이 된 소록도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분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전해준 박애와 인권, 봉사정신을 그대로 실천한 삶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센인들만 돌보았던 그녀들의 숭고한 희생과 그들이 베푼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이에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헌신적인 공로와 봉사의 숭고한 참뜻을 널리 기리며, 인권과 통일, 인류의 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에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시행하는 “2016년 만해실천대상에 추천합니다.
주요공적 요지
한센인 자녀 영아원 운영 및 보육사업
- 한센병 미감염자녀 영아원 운영
- 한센병 미감염자녀 소록도 보육사업 담당
한센인 환자 재활치료
-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
- 물리치료기 도입 후 재활치료 실시
한센인 환자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인 공익서비스 제공
- 한센인 주거 환경 개선
- 무조건적 지원보다 일자리 창출을 통한 한센인 자립화
- 한센인 의료보험 혜택 마련
한센인 의료 시설 도입
- 오스트리아 지원으로 국립소록도병원 내 결핵병동 건립·기증
-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지원금으로 해외 의료약품 구입
한센인 환경 개선 지원금 모금 활동
- 오스트리아에 지원금 신청 후 환경 개선 사업 추진
- 한센인 지원금 모금 활동
 
 
2016만해실천대상 수상 소감
마리안느 수녀
소록도에 다녀온 후 오스트리아에서 전화로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특별하게 한 일이 없는데 이런 귀한 상을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상을 주시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이자 동료인 마르가레트 수녀에게도 좋은 소식을 꼭 전하겠습니다.
11년만에 다시 본 소록도는 놀라웠습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몰라보게 달라져 있더군요. 예전에 없었던 다리도 생기고 건물도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옛 친구들은 그대로였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친구들도 저를 기쁘게 맞아줬고 사랑한다고, 저희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하더군요. 소록도에서 지낸 57일동안 하루하루가 축복이었습니다. 마르가레트가 꼭 한국을 방문해 발전된 소록도와 환자들의 향상된 모습을 직접 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처음 소록도에 갔던 1962,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름을 따라서 소록도에 갔지요. 그저 남을 도와주고 싶었고 복음을 따라서 살고자 했습니다. 특별한 게 전혀 없지요. 43년동안 소록도에서 진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의 좋은 친구였을 뿐입니다. 환자들이 치료 끝나고 가족 품으로 돌아갈 때 가장 기뻤고, 손과 발을 다 수술하고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환자를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2005년 소록도를 떠날 때 우리도 많이 울었습니다. 소록도에서 죽고 싶었는데 대장암에 걸려 세 번이나 수술을 받게 돼 떠나야 했습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데 짐이 되긴 싫었지요. 행여나 직원들이 따라올까 봐 광주로 나와서 편지를 부치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지금 오스트리아 작은 마을 마트레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르가레트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냅니다. 많이 아픕니다. 옛날 얘기를 잘 하는데 요즘 생긴 일은 기억을 잘 못합니다. 지금도 가끔 본인이 소록도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제가 일주일에 세번씩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마르가레트도 보고 옵니다. 지난 방문 때 소록도 친구들 사진을 많이 찍어가서 마르가레트에게도 보여줬습니다. 함께 얘기하면서 기쁘게 봤습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만해 한용운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지만 사랑을 실천한 그 분의 정신을 기리는 상이라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데 이런 큰 상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리=허윤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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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만해문예대상 추천서
이미자(75. 가수) Lee Mi Ja (Singer)
가수 이미자씨는 반세기가 넘는 57년간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히트곡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온 엘레지의 여왕이자 국민 가수입니다. 1941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을지로 화원시장의 점원으로 일하던 아버지 이점성과 어머니 유상례 사이에서 24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2살이 되던 1943년에 아버지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면서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재능을 키웠습니다. 이씨는 18세이던 1958년 국내 첫 TV방송 HLKZ의 콩쿠르 프로그램에 가요부문 1등을 차지했습니다. 이듬해 열아홉 순정으로 가수로 데뷔했고 이후 지금까지 57년 간 꾸준히 활동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불러왔습니다. 이씨가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된 것은 1964년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곡 동백아가씨를 부르면서 부터였습니다. 이 노래가 실린 음반이 그 당시 100만장 이상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작곡가 박춘석 선생과 손 잡고 활동하던 1960년대 중반부터는 그야말로 10여년 넘게 이미자 시대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사람들에게 수많은 명곡을 들려줬습니다. 한해 10여장씩 음반을 발표, 데뷔 10년 만인 1969‘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1967년 발표한 엘레지(悲歌)의 여왕이란 노래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본인에게도 엘레지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동백 아가씨를 비롯,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등 스스로 꼽는 3대 히트곡이 모두 이 시기에 탄생해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큰 위안을 줬습니다. 1960년대 내내 한해에 음반을 무려 10여장씩 발표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데뷔 10년 만인 1969‘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을 가졌을 정도였습니다. 1991KBS자료실은 이씨가 취입한 노래를 2064곡으로 집계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몇 장의 음반을 더 발표해 지금은 2500여곡으로 늘어났습니다. 국내 가수들 가운데 누구도 견줄 사람이 없는 대기록이며,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씨는 음반으로 치면 560여장의 앨범을 냈으며 무대에서 공연한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1979년에는 대한극장에서 데뷔 2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했고, 1985년 일본 도쿄, 오사카에서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1989년에 뉴저지 등에서 미국공연을 열었습니다. 특히 이 해에는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기념 30주년 공연을 개최하며 대중가요 역사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게 됐습니다. 2003년에는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 동평양대극장에서 노래한 가수이기도 합니다. 오직 기록만이 이씨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스스로 일생 최고의 공연으로 월남전 위문공연을 꼽았고 일생 동안 수많은 위문·자선 공연으로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로 녹여줬습니다. 월남전 당시 이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목'을 받아 월남에 가서 공연을 했는데 공연 때 마다 객석은 매번 울음바다였다고 합니다. 이씨 본인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위로가 되기는커녕 장병들 맘을 상하게 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씨는 57년간 쉼 없이 활동했지만, 스스로 은퇴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날까지 무대에서 사람들에게 제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고 결심입니다. 그 때문에 최근에는 5년 단위로 열던 기념공연도 더 자주 열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때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오르겠다는 결심 때문입니다. 지난 2월에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57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습니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이씨는 정부로부터 수차례 훈장을 받았습니다. 1967년 무궁화 훈장을 받았고, 1995년 화관문화훈장, 1999년 보관문화훈장(3등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대중가요 분야에서 최초로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해 지금까지 한결같이 노래로 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리면서 한국 대중문화 발전에 혁혁한 공로를 세워온 이씨를 만해문예대상 에 추천합니다.
2016년 제20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소감
이 미자 (가수) Lee Mi Ja (Singer)
한평생 노래만 불러온 제가 만해문예대상이라는 귀한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에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특히 대중문화 부문에서는 첫 수상자라는 말씀을 듣고서 더욱 놀랐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시대, 민족 운동과 시()를 통해 우리 민족의 설움을 달래고 앞길을 제시했던 선각자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라고 배웠습니다.그리고 보면 제가 반세기 넘게 부르고 있는 전통 가요도 만해의 시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일제시대와 분단, 전쟁과 가난 등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에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달랬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그래서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정직하게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전통 가요를 부르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게 됩니다. 가볍고 요란한 기교는 당장은 듣기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트로트라는 국적 불명의 단어를 그리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과 설움을 담은 노래라면 '전통 가요'라고 불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만해문예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데뷔 이후 제가 섰던 무대와 불렀던 노래들, 녹음한 음반들을 차례로 떠올려 보았습니다. 1991KBS 방송사의 집계에 따르면 음반 560, 발표 곡은 2,069곡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금은 조금 더 늘었을 테니 2,500곡정도 되겠지요.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데뷔 이후 매년 10여장 가까이 음반을 녹음하며 지금까지 부지런히 노래했습니다.반세기 조금 넘는 노래 인생에서 잊히지 않는 무대들이 있습니다. 1989년 조선일보사 주최로 열렸던 가수 데뷔 30주년 기념 리사이틀 당시에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해주셔서 성황을 이뤘습니다. 2002년 남북에서 동시 생중계됐던 평양 특별 공연이나 201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한국 근로자 파독 50주년 공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월남전 당시 파병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베트남을 네 차례 다녀왔던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젊고 씩씩한 장병들이 동백 아가씨에 맞춰 박수를 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오히려 미안해졌습니다. 장병들의 사기를 높여야 할 시기에 괜히 마음만 아프게 한 건 아닌지 걱정 근심이 앞섰지요. 하지만 장병들은 공연이 끝난 뒤 제게 괜찮다. 맘껏 울을 수 있어서 차라리 후련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전통 가요가 오늘날까지 사랑 받고 있는 것도 이런 노래의 힘 덕분일 것입니다. 만해의 민족 사랑과 예술 정신을 기리는 큰 상을 받게 되어 다시 한번 영광이라는 말씀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8. 12 이 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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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만해문예대상 추천서
이승훈(75세.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이승훈(1942~)은 1963년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혁신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주창해온 한국현대시의 살아있는 역사다. 한국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자신의 시의 근거가 된 시 이론을 정립한 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50여 년 동안 시집과 시 이론서를 꾸준히 출간하며 이를 실증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시인은 한양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8년부터 모교인 한양대 국문과에서 시학을 가르쳤으며 유수의 문학잡지를 통해 수백 명의 시인을 배출했다. 이승훈은 등단 이후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아방가르드 정신을 잠시도 놓지 않은 시인으로 한국문단에서 이상, 김춘수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이승훈이 그간 첫시집 <사물A>(삼애사,1969)를 비롯 최근에 출판한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시와세계, 2014)까지 24권의 시집과 시 선집을 출간했다. 또한 ‘시론이 겸비되어야 진정한 시인이다.’라는 그의 평상시 지론대로 <반인간>(조광출판사,1975) 이후 <선과 아방가르드>(푸른사상,2014)까지 36권의 시론과 이론서를 저술했다. 수필과 번역집 등 기타 저술까지 합하면 70여권이 넘는 저서이다. 이승훈은 1990년대 말, 자아탐구와 자아소멸에 대한 한계를 절감하며 ‘나’와 ‘언어’와 ‘대상’까지 버리고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를 거쳐 새로운 시학을 구축하기 위해 고뇌하였다. 당시 <금강경>을 접한 기연으로 이승훈은 자신의 시세계를 불교적 사상인 선(禪)으로 전환한다. 그가 추동했던 아방가르드 정신이 불교사상인 선의 세계에 녹아들면서 이승훈의 독특한 전위선시 즉 현대선시가 탄생하는 전기가 된 것이다. 이후 시집 <인생>(믿음사,2002)에서 <비누>(고요아침,2004) <이것은 시가 아니다>(세계사,2007) <화두>(책만드는집,2010 )와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까지 모두 그의 집약된 선사상으로부터 발화된 선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력 50년이 넘는 이승훈의 시세계는 그의 시론과 함께 ‘비주체’, ‘비대상’, ‘비언어’와 ‘영도의 시 쓰기’로부터 ‘불이의 개념’까지 확산되어 있다. 그는 이처럼 선의 시각으로 시의 문제를 조목조목 파악하며 현대선시가 현대시의 불가능성을 해결하는 첩경임을 자신의 시와 시론서로 증명하려고 했다. 이승훈은 선사들의 공안을 기호학의 시각으로 분석한 <선과 기호학>(2005), 아방가르드 예술을 선의 시각으로 해석한 <아방가르드는 없다>(2009), 하이데거 철학을 선시를 중심으로 해석한 <선과 하이데거>(2011), 자신의 시 쓰기를 대상에서 자아, 자아에서 언어, 언어에서 영도의 문제로 발전시키며 중도의 시각으로 현대시의 이론을 구축한 <영도의 시쓰기>(2014)를 저술했다. 또한 무언어, 무분별, 무사유의 무주無住의 시학을 지향하는 사상을 제시한 <선과 아방가르드>를 펴내었다. 그는 특히 <선과 아방가르드>에서 일상 그대로가 선이며 평상심이 적용되는 마조선 시학과 무위진인이 되어 ‘시를 만나면 시를 죽이’는 임제선 시학을 제시한다. 이에 기초하여 아이들 같은 마음으로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무작과 분별없이 대상을 보고 그대로 진술하는 무설과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배제하는 무학이 시의 중심이 되어야함을 역설한다. 이승훈의 후기 저술들은 선에 대해 기호학-미학-철학-시학으로 발전과정이며 그의 선적 접근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시집 <인생> 이후 이론의 토대와 그 중심적인 사상이며 나아가 현대시의 주류에 현대선시를 편입시키고자 하는 이승훈의 심도 있는 시론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집과 시론서는 청정심을 갖고 시를 쓰며 공(空), 불이(不二)와 불이(不異), 중도(中道)의 불교사상이 그의 정신세계를 점유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승훈이 독보적으로 개척해온 시와 시론은 향후 우리나라 현대시를 계속 발전적인 방향으로 확장하는 귀감과 사표가 될 것임을 예견한다. 또한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을 시현하는 예술가와 특히 시인들에 의해 그의 시와 시 이론이 조명되고 문학사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2016 제20회 만해 문예대상 수상소감 - 이제 시는 시를 모른다.
이 승 훈 (시인) Lee Seung Hoon (Poet)
시는 사유이다. 시가 아니라 시에 대한 사유가 있고, 시에 대한 사유가 시다. 과연 시는 어디 있는가? 시는 이론과 역사에 지나지 않고, 이론과 역사는 사유이고 철학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사유는 감정과 이성 사이에 있고, 시와 철학 사이에 있으므로 철학이며 동시에 철학이 아니다. 그동안 나를 지배한 것이 그렇다. 시에 대한 사유는 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선험적 조건이고 시의 특성이다. 그 동안 대상, 자아, 언어의 문제를 거쳐 온 나의 시 쓰기는 이제 영도의 문제에 닿아 있다. 언어의 문제는 자아소멸의 단계에서 제기되는 시 쓰기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대상과 단절된 자아 찾기가 모더니즘에 속한다면 자아소멸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한다. 언어가 시를 쓴다는 것은 시라는 장르, 법, 제도 속에서 이 법과 싸우는 행위이고, 시인은 주체(subject)가 아니라 법에 종속되는 자(subjection)이므로 이런 종속에서 벗어날 때 시적인 것은 없고 시도 없다는 주장, 곧 시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발생한다. 언어의 문제에 천착하던 무렵, 나는 금강경과 만나고 자아도 相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자아도 상이고 언어도 상이다. 그러므로 언어도 소멸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영도론은 자아-대상-언어 모두 소멸한 다음의 시 쓰기를 다룬다. 이른바 ‘영도의 시 쓰기’다. 시에 대한 사유는 대상, 자아, 언어에 대한 사유이고 이제 대상, 자아, 언어가 소멸하고 시에 대한 사유는 마침내 영도의 사유, 사유의 영도와 만난다. 남은 것은 쓰는 행위뿐이다. 그저 쓰는 행위가 있을 뿐이다. 목표도 의도도 대상도 없는 시 쓰기이다. 그러나 선적 사유를 전제로 하면 자아는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이른바 不二의 자아가 된다. 그러므로 나의 시 쓰기는 자아 찾기(초기)-자아 소멸(중기)-자아 불이(후기)의 단계로 극복된다. 극복되는가? 극복이 아니라 시각의 전환이다. 결국 시는 없고 시라는 이름이 있고, 쓰는 행위만 있다. 쓰는 행위만 있는 시 쓰기는 영도의 시학, 선의 시학, 중도 시학으로 발전한다. 50년 시 인생. 과연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썼는가? 난 아직도 사는 게 서글픈 떠돌이 시인, 자폐증에 시달리는 늙은 정년퇴임 교수, 3류 禪客일 뿐이다. 언제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시를 썼지만 이제 시는 시를 모르고 사유는 사유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無心의 光明도 꿈입니다.”라고 노래한 만해가 생각난다. 큰 상을 주시는 만해축전추진위원회에 특히 감사드리고 3류 禪客에게 方丈이라는 법명을 주신 무산 오현 스님께 감사드린다.
2016. 8. 12 方丈 이 승훈 합장. - 이 수상 소감은 2014년에 발표한 다른 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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