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SITEMAP   동국대학교  


DB_navi24
메인
home > The Manhae Prize > The Manhae Prize Winners  
1st 2nd 3rd 4th 5th 6th 7th 8th 9th 10th 11th 12th 13th 14th 15th 16th 17th 18th 19th 20th
2015 만해대상수
상자.jpg

만해축전추진위원회회가 만해 한용운의 생명 사랑·겨레 사 랑·평화 사랑의 큰뜻을 기리고자 제정한 제19회 ‘만해대상’ 각 부문 수상자를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2015년 6월 3일
 
만해평화대상 / The Manhae Peace Prize
-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역사학 교수)
 
만해실천대상 / The Manhae Practice Prize
- 청전 스님 (히말라야 빈민구제 활동가)
- 무지개공동회 (발 달장애인 공동체)
 
만해문예대상  / The Manhae Literature Prize
- 정현종 (시인, 예술원  회원)
- 신영복 (교육자, 성공회대 석좌교수)
- 황병기 (가야금 명인, 예술원  회원)


2015년 제19회 만해대상 심사에 임하면서 우리는 이 나라를 되찾고 세우기 위해 전심전력 노력하다가 순절하신 애국선열께 머리 숙 이고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한 수상자 선정을 위해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각 계각층으로부터 많은 후보자를 추천받았다. 최종 심사는 6월 3일 서울에서 심사위원들이 참석하여 진지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이 제19회 만해대상 수상자를 확정하였다. 
제19회 만해대상 심사위원회


2015 알렉시스더든.jpg

제19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과 교수)
The 19th Manhae Peace Prize Winner - Alexis Dudden (Professor of History at University of Connecticut)

 
1. 수상자 선정 이유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야만적 성착취 시스템하에서 고통을 겪 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과 다른 국가의 역사교과서 기술을 억압하려는 기도에 경악 을 금치 못한다.”
2015년 2월 미국 역사학자 19명은 일본 아베 정권의 미국 역사교과서 왜곡시도를 고발하는 집단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만 해도 역사학자들의 움직임은 ‘찻잔 속의 태풍’처 럼 여겼다. 특히 일본 정부는 그랬다. 그렇지만 일본의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 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인 2015년 5월, 이번에는 187명의 세계적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다 시 한 번 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역시 종군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세계의 저명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 역사학자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이라 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20세기에 있었던 수많은 전시(戰時) 성폭력과 군(軍) 주도 성매매 사례 중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는 방대한 규모와 군 차원의 조직적 관리, 점령지의 어리고 가난한 취약 여성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여성 의 권위와 동등한 권리인 만큼,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에는 역사적 발걸음이 될 것이다.”
성명 참가자들의 면면은 2월 성명과 질과 양에서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태평양전 쟁에 히로히토 일왕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내용을 다룬 《히로히토 평전-근대일본의 형성 》으로 퓰리처상(2001년)을 받은 허버트 빅스 빙엄턴대 명예교수, 전후 일본의 변화와 성 장을 규명한 《패배를 껴안고》로 역시 퓰리처상(2000년)을 받은 존 다우어 MIT 명예교수, 《넘버원 일본》이란 저서로 유명한 아시아 연구의 대가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등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학자 들이 나섰다. 일본계 학자들도 33명이나 참여했다. 미국 외에도 캐나다, 영국, 독일, 스위 스, 오스트리아, 호주, 싱가포르 등의 역사학자들도 동참했다.
2015년 5월 말 현재 460여 명으로 참여자가 늘어난 역사학자들의 잇따른 성명을 이 끌어낸 주인공은 미국 코네티컷대 알렉시스 더든 교수이다.
더든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동북아 역사 전문가다. 특히 한일 관계에 정통해 일본 의 한국 식민사에 대한 연구가 전공 분야다.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시카고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더든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독도,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 국명 댜오위다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 열도 분쟁에 얽힌 역사적 실체와 국제조 약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일본 릿쿄대와 게이오대, 한국의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공 부한 적이 있어 한국과 일본 모두에 대해 정통하다. 그의 연구실에는 독도 사진이 걸려 있 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독도를 두 차례 방문하기도 한 그는 독도를 “너무도 아름다운 섬” 이라고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 모두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랬던 더든 교수가 한일 간에 첨예하게 인식 차이를 보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놓고 역사학자들의 성명까 지 이끌어낸 것은 학자적 양심 때문이다.
더든 교수는 그동안 국내외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은 일관된 입장을 분명히 밝혔 다. 더든 교수는 역사학자들이 뭉치게 된 이유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논쟁거 리가 아니라 전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일본 정부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바꾸거 나 역사에서 지우려 한다”며 “특히 일본 정부가 미국 역사 교과서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다 는 것은 학문 자유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역사학자들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종군위안부 책임회피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반박한다. 2015년 6월 서울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열린 ‘한일 협정 50년사의 재조명’ 국제학술 회의에서도 “위안부 행위는 당시에나 지금도 인신매매와 납치죄에 해당하며 (전쟁 전의 일본 형법과 현행 형법에 의해서도) 국제 인신매매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분명한 범죄행 위라는 것이다.
또 아베 총리의 ‘인신매매’ 주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논박한다. “아베 총리는 ‘인신매 매’라는 용어를 쓸 때마다 누가 인신매매를 저질렀는지를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 답은 간단하다. 일본 국가가 한 것이다.” “강제동원 위안부는 위안부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현재 비열하게 주장하는 ‘종군 민간인’이 아니라 국가 최고위층에 의해 조직된 시스템에 갇혀 있었다.” “피해자는 성행위를 거부할 자유도, 살 곳이나 이주 지역을 결정할 자유도, 위안소를 떠나 그 일을 그만둘 자유도 없었다. 일본군은 위안소가 설치된 것을 알고 있었 으며 이는 성노예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더든 교수는 “우리는 가난한 역사학자들이지만 늘 진실을 말하고 과거를 연구해 미 래를 예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힘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국제정 치무대에서 외롭게 역사적 사실을 외치고 있는 더든 교수의 활동은 더욱 가치가 빛나고 있다.

2. 수상소감
만해의 시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하려는 일은 마치 물을 처음 들이켜는 순간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의 말들은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어있으니까요.
만해는 순수한 노래에 화음이나 반주를 덧입히는 일을 경계했습니다. 그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노래 역시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뜻이 통할 테니까요. 설명하 기 위해 인위적 노력이나 기교를 덧입히는 일이야말로 만해의 깊은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저는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후원자가 됐던 폭력 행위를 포함해 고의적 폭력 행 위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국가는 법을 초월한다’는 발상은 국가와 국가주의자들 사이에 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들은 그런 발상이 적법하다고 정당화하기 위해 엄청난 폭력 행위를 저지르지요. 이 점이야말로 현대사회의 핵심적 모순이며, 그 강도는 더욱 높 아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말해 이렇게 하다가 우리는 자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다행히 우리가 안전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면, 우리는 현대사에서 국가가 후원자가 됐던 끔찍한 사례를 체험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쉽게 배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안전함에는 의무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이 사실일 리 가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끔찍한 사실들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유사한 폭력이 반복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인식은 실천이 되며, 실천은 조금 더 인간적인 세 상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저는 우리 시대에 가장 평화적인 사람 가운데 한 분이었던 만해를 기 리는 이 상을 겸허하게 받고자 합니다.

Trying to remember initial encounters with Manhae’s poetry is like trying to remember first sips of water. His words already seem to be part of you.
Manhae cautioned against setting pure songs to music; like his words, such songs make sense without effort. To me, this essence makes clear that things that run afoul of Manhae’s deep humanism are things that need effort or artifice to explain ― and maybe that they will never be made sense of.
In particular, I am thinking about acts of intentional violence―especially acts of state-sponsored violence in the modern world. The notion of the state as an entity above the law―by definition above accountability― is at once powerful and fraught among existing states and state-aspirants. Both commit prodigious acts of violence in their own name as if to justify their existence as legitimate. This is the heart of modernity’s contradiction and is only increasing in intensity.
Put simply, we know we can destroy ourselves; how should we act? If you are privileged to live securely, you can learn fairly easily about examples of state- sponsored horror in the modern past and present without living in the middle of them. Such security comes with responsibility, however. The shock of learning about something that makes you think, “But this cannot be true!” should propel you to try to prevent similar violence from occurring again. Knowing becomes doing, and the doing becomes a step in making the world a little more humane.
It is with these thoughts in mind that I humbly accept this great honor connected to one of the most peaceful individuals of the modern world.


2015 
청전스님.jpg


제19회 만해실천대상 수상자 - 청전 (스님)
The 19th Manhae Practice Prize Winner - Cheoung Jeoun 

1. 수상자 선정 이유
히말라야에서 빈민구제 활동을 하는 청전 스님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승려다. 1953 년 전북 김제시에서 태어난 스님은 처음에는 교사가 되려 교육대학(전주교대)에 다녔다. 그러나 ‘10월 유신’에 연루돼 12월 자퇴하고 1973년에는 가톨릭 신부가 되려 대건신학대 를 다녔다. 가톨릭 신부 수업을 받던 중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겨 송광사로 출가, 송광사 에서 구산 스님에게서 1978년 사미계를, 1979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생긴 것은 1987년 5월의 동남아시아 불교 순례길 에서였다. 인도에서 가톨릭의 테레사 수녀를 만난 데 이어 그해 8월 1일 히말라야 다람살 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당시 35살이었던 그는 히말라야 기슭에서 많은 사람을 가 르치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어 인도에 정착한 이후 그곳에서만 27년간 수행해오고 있다.
그는 조계종 소속 승려이고,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서 티베트불교 수행자이지만, 히말라야 오지인들에 겐 ‘산타 멍크(산타클로스 스님)’로 불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도에 머물기 시작 한 이래 지금까지 한 해도 빼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들을 다니며 보시행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가는 지역은 인도와 중국(티베트 쪽) 접경 지역인 라다크와 잔스카르, 스 피티 지역이다. 이 고을들은 각자 예전에 한 왕국이 있었을 만큼 지역적으로 넓다. 그러나 워낙 고지대에 있는 척박한 땅이어서 거주자는 많지 않다. 그 지역 대부분이 해발 3천~5 천 미터 고지대에 있고 마을이 수 킬로씩 떨어져 있어서 병원도 약국도 학교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들은 동자승이 되어 절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들은 1 년 중 절반가량이 눈과 얼음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산다. 날이 풀리는 여름이면 청전 스님은 지프를 빌려 한 차 가득히 한국에서 보시받은 영양제인 삐콤과 치료제 등 약품, 돋보기와 시계 등 생활필수품을 싣고 오지로 떠나 한 달간 보시 순례를 한다. 오지에서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은 매년 한 차례씩 청전 스님이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 린다.
청전 스님은 각 마을에서 스님과 주민들 한 명 한 명의 병명을 듣고 거기에 맞는 약 품을 전해준다. 시력이 약한 노인들에겐 돋보기와 시계를 준다. 청전 스님의 그런 보시 여 행이 연차를 거듭해가면서 그 지역에선 청전 스님이 약을 주면 모두 낫는다는 믿음까지 생겨서 더욱더 청전 스님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여 년이 다.
오지마을 학교 학생들도 영양 결핍으로 고통받기는 마찬가지다. 오지 학교에는 보통 10~30명의 학생이 있는데, 한 학교에 젖소 한 마리만 있으면 전교생이 그 젖소에서 짠 우 유로 영양 문제가 크게 개선된다고 한다. 현지에서 젖소 한 마리는 한국 돈으로 1백만 원 가량이다. 라다크와 잔스카라, 스피티에 동자승 학교가 있는 곳 중에 스님이 젖소를 사주 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의 보시는 다른 자선단체와 달리 정부나 기관의 지원을 받는 법인이나 재 단을 설립하지 않고,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는 조직을 만들면 보시도 자칫 사업 이 될 수 있다며 조직을 만들지 않고 보시행을 이어가고 있다. 청전 스님이 보시받는 금액 과 인세 수입 등을 모두 합쳐 1년간 총수입은 6천만 원가량이다. 다람살라에 달라이 라마 의 법문을 들으러 온 이들이 통역해준 그에게 보답한 것이거나 한국의 도반과 소수의 지 인이 십시일반 보태준 보시금이다. 그의 보시 여행엔 늘 한국에서 간 순례자들이 적게는 2~3명, 많게는 4~5명이 매년 동행해왔는데, 동행자들은 청전 스님이 보시받은 돈 대부분 을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는 데 놀라곤 한다.
동행자들이 특히 놀라는 것은 한국인 한 명의 연봉에 불과한 그 돈으로 우리나라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합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는 방대한 지역의 오지인들 대부분에 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자들은 청전 스님 한 수행자의 노력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이 나의 부처님’이라고 여기면서, “10년 수행 하면 20년 봉사할 수 있고, 20년 수행하면 40년 봉사할 수 있다”는 자신의 스승 달라이 라 마의 말대로 수행과 봉사의 삶이 둘이 아닌 하나로 회통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2. 수상소감
인생 수행길에 1987년 8월 1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첫 외국 순례에서 바로 달라 이 라마를 만났고 내 수행길의 의문과 갈증을 풀은 만남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7월 인도에 발을 딛자마자 당신이 계시는 다람살라로 향한 발길은 저쪽 히말라야 산 넘은 라다크로 향하게 되었다. 북인도 라다크의 조그만 수도 레(Leh)란 동네에서 여름 안거 중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안거가 끝나자마자 만날 수 있었고 많은 질문과 함께 수행의 길 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후 28년을 이 한자리에서 살게 되는 인연이 되었다.
라다크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난 인연 때문인지 매년 라다크를 찾아가게 되었다. 절 과 오지 마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의 숨은 이면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사는 스님들이나 마을 주민들에게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정말 소외되고, 가난하고 헐벗은 지역이었다. 절에는 많은 노스님과 사미승들이 있었고, 마을주민들은 겨우 먹고 살아남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농작물 몇 가지가 다였다. 그쪽 지 역은 해발 3,500m부터 시작되는 고산지대이다.
이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의약품이 필요했고 현대 문명의 이기물이 필요했다. 하찮은 영양제 한 가지를 받아 갈 때 흘리는 눈물은 뭘 받아 가는데 감사해서가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이 한 생에 한 인간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감사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드러나지 않는 민중에 대한 자비의 실천행과 배려에서 그들은 오히려 내 수행의 바 탕이 되어 왔다.
고개를 덮고 있는 눈만 녹으면 지프 위에까지 짐을 가득 싣고 오가기가 근 이십여 년이다. 어떤 해는 네 번을 왕복하기도 했다. 4~5천 미터 높이의 고개 열두어 개를 넘어 한 바퀴 빙 둘러 오는 데 최소한 한 달이 넘게 걸린다. 또 파키스탄 국경 지역과 티베트 국 경 지역을 들어갈 때는 일주일의 체류 허가증을 받고 나서야 들어가 봉사활동을 한다. 한 번은 CID(인도 정보국)의 세심한 추적을 받기도 했다. 해마다 국경을 넘어 적대국의 민감 한 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의심한 것이다. 결론은 나왔다, 굿 닥터(Good Doctor)로! 즉 명 의(明醫)로! 한 비구가 하는 의료봉사에 대한 보고서가 인도 정부는 물론 한국대사관까지 에 보고된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그쪽 주민들에겐 내가 제공하는 어떤 약이라 도 만병통치된다는 믿음이 있다. 내가 명의는 무슨 명의, 평생 약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현대 의약품이 큰 효과가 있을 뿐인 것을.
이번 상의 인연으로 인도에 머무는 한은 라다크의 오지 곰빠(절) 스님들이며 주민들 과 남은 세월을 함께할 것이다.
이런 일은 나 스스로 좋아서 해왔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일을 빌미 붙여 성금을 모으거나 돕자는 어떤 호소를 한 적 없이, 인도란 수행 터에 살아가는 업보인 양 오히려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해왔다. 순수한 선연의 인연으로 말이 다. 흔히들 좋은 일 한답시고 시작한 거창한 타이틀이며 구좌번호가 끝내는 구린 사건으 로 전락하는 매스컴 보도를 얼마나 보아왔던가. 그러면서 종교의 틀을 의심하고 허탈감에 빠지기도 하며 나아가 살아가는 데 생명력을 상실하기도 해왔다.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라다크의 사람을 위한 일에 드러나지 않게 도움 준 모든 이들 에게 감사하며, 이 상의 공덕을 그분들께 돌려야 한다고 본다. 저 멀리 히말라야 설산 영 봉이 누구에게나 미래와 희망을 주듯, 선행은 끝내 드러나지 않게 실천할 때가 진정한 보 시 실천행이기도 하다. 원래 불교철학에서 어떤 착한 일일지라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해야 함이 참불교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2015 천노엘 신부.jpg

제19회 만해실천대상 수상자 - 무지개공동체(대표 천노엘 신부)
The 19th Manhae Peace Prize Winner

 
1. 수산자 선정 이유
아일랜드 출신 천노엘 신부(83)가 대표인 무지개공동회는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룹홈을 시작하면서 발달장애인을 우리 사회 안에 서 떳떳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운 단체이다.
무지개공동회 대표인 천 신부는 장애인을 위해 한 일로 상을 받는 것을 극도로 거부 한다. 1990년대부터 여러 차례 장애인단체, 인권단체 등에서 상을 수여하려 했으나 “나는 그들과 친구”라며 수상을 거부했다. 2014년 포스코청암상도 그래서 무지개공동회 이름으 로 받았다.
그러나 무지개공동회의 활동을 천 신부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천노엘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의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이다. 1957년 처음 한국에 온 천 신부는 20여 년간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일반 성당 사목을 했다. 그랬던 그가 당시엔 정신박약자로 불 리던 발달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9년 한 무연고 발달장애인 소녀의 죽음 이 계기가 됐다. 성당 신자들과 가끔 봉사활동을 가던 광주 무등갱생원에서 만났던 당시 19살짜리 ‘김여하’라는 소녀가 갑자기 위독하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임종 한 것. 그가 손을 잡아주자 김여하는 어눌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졌 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장례를 잘 치러드릴 테니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해달라’고 했다. 그는 ‘19년 동안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살다가 떠난 여하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 각해 거절하고 광주 양산동 천주교 묘원에 매장했다. 지금도 그가 세운 비문에는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천 신부는 요즘도 매년 명절 때면 김 여하의 묘를 찾아 벌초하면서 초심을 되새긴다.
천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수용시설이나 집안에서만 살아온 발달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결심한다. 알코올중독자나 다른 신체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의사 표현 할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헌신 을 다짐한 것이다.
그는 1981년 유엔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에 안식년을 얻어 유럽과 호주, 미국, 캐 나다 등을 다니며 발달장애인 돌봄의 현장을 확인했다. 결론은 ‘장애인도 산속의 대규모 시설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주대교구 에 사제가 부족한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천 신부는 당시 윤공희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 특 수사목을 시작하게 됐다. 첫 결실은 1981년 광주 시내 주택가를 빌려서 문을 연 그룹홈이 었다. 장애인시설에 있던 무연고 여성과 봉사자와 함께 그룹홈을 열자 여기저기서 ‘미쳤다 ’고 했다. ‘장애인은 시설에 있는 게 가장 좋다’고도 했다. 그러나 천 신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역사회 안으로 데려와 ‘거주, 여가, 직업’을 함께 하도록 이끌어냈다.
그렇게 시작한 살림이 하나씩 늘어 현재 무지개공동회는 광주 시내 아파트에 위치 한 그룹홈 6곳과 엠마우스복지관, 엠마우스산업, 유치원에까지 이른다. 특히 1991년 하남 산업단지에 입주한 엠마우스산업은 40여 명의 발달장애 근로자가 화장지와 양초를 생산 하며 자립을 꿈꾸는 사회적 기업이다. 양초는 연간 10만 개를 생산해 국내 각 교구의 성당 에 전례용으로 공급되며, 화장지는 2년 연속 인천국제공항에 납품하고 있다.
만 35 년간 그룹홈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고 현재도 20~60대 장애인 4명과 함께 생활 하고 있는 천 신부의 꿈은 더 크다. 장애인들이 그룹홈에서도 독립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립하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배드민턴, 축구, 볼링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 엠마우스복지관 등 출신 130여 명이 하남공단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반 공장에서 일하는 것 등이 그에겐 자랑거리다.
천 신부는 발달장애인 문제에서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신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오기 위해 여객선을 타고 뉴욕에 내렸을 때 흑인에 대한 차별을 접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그때는 식당에도, 버스에도 흑인이 들어올 수 없었어 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흑인이 대통령이 됐잖아요? 그 사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태도가 문제입니다. 장애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설립한 그룹홈과 회사는 이름이 모두 ‘엠마우스’다. 엠마우스는 부활한 예수를 찾아 제자들이 찾아가는 곳. 그러나 제자들은 바로 곁에 부활한 예수가 함께 가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다. 바로 우리 사회가 그런 것이 아니냐는 따끔한 지적이다.

2. 수상소감
광주광역시 지역 내 지적 · 자폐성 장애인의 복지증진을 위한 사업-엠마우스복지관 (집, 산업, 보호작업장, 일터, 어린이집, 그룹홈, 주간보호센터 운영)-을 실천하고 있는 무 지개공동회가 만해실천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기쁨과 함께 사랑을 전합니다.
이 귀한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고 장애를 가진 분들과 그 가족, 그리고 직 원들 후원자들 자원봉사자들 모두가 포함된 무지개공동회이며 무엇보다도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지역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장애를 가진 분들이 이 상의 주인공입니다. 무지 개공동회가 만해실천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저는 만해 한용 운 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후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니 만해 한용운 님께서는 시인이요 스님이시며, 한국의 독립운동가로서 〈님의 침묵〉이란 유명한 시로 한국 국민에게는 유명 한 분이더군요. 저는 외국 사람이니 한국에 60년 가까이 살았어도 잘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만해 한용운 님께서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 은 지금 이 시대의 장애인들이 사회의 냉대와 편견 속에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자 투쟁 한 것과 어쩌면 같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복지 증진을 위한 여정은 아주 어려운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이자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로서 24년간 본당 사 목 활동을 하면서 주변에 살고 있는 지적·자폐성 장애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기 시작 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광주 무등갱생원을 자주 방문하고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결 핵환자, 고아, 갈 곳 없는 노인, 알코올중독자와 정신질환자, 지적장애인 등 약 600명 정도 가 한 울타리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수용자들 중에서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 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다른 사회약자들과 비교하여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주장할 힘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반드시 대변인, 옹 호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본당 사제관에 있는데 자원봉사자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19살 지적장애 인 ‘여하’가 갑자기 급성폐결핵으로 기독병원에 입원했는데 빨리 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 다. 그래서 저는 즉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가보니 여하가 임종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여하 의 작은 손을 잡았는데 여하가 저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하고 운명 하였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여하가 연고도 없고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장례식의 책임을 병원 측에서 지겠다면서 시체를 병원 연구실에서 해부용 시체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저 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습니다. 여하가 비록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교회 묘지를 하나 구하고 장례식을 지낸 다음 비석을 세울 때 이런 글을 썼습 니다.
“사회를 용서하시렵니까?”
그 후 제가 묘지에 갈 때마다 땅속에서 들려오는 여하의 외침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 았습니다. 그래서 여하와 같은 지적장애인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응답하기로 결심하였습니 다.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이하면서 저는 지적장애인들 몇 명과 함께 일반주택에 입주하여 한 가정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지역사회 최초의 지적장애인들 을 위한 그룹홈이었습니다.
저는 그 집에 입주할 때 다음과 같은 꿈 즉 소망을 품었 습니다. 무지개공동회의 친구들과 같은 분들에게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 공해주면 이분들도 우리처럼 지역사회 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34년 전의 이 같은 저의 꿈과 소망이 이제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시설에 있는 많은 지적장애인 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와서 다양한 경험을 즐기고 질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소망합니다. 
저의 이 꿈이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이 뜻깊은 만해실천대상을 받을 수 있도록 애써 주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 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5 신영복.jpg

제19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 신영복 (성공회대 교 수)
The 19th Manhae Literlature Prize Winner - Yeoungbok Shin
1. 수상자 선정 이유
신영복 교수는 오랫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 자 저술가이다. 많은 사람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 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 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 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20년 20일 동안 영어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88년 가석방된 신영복 교수는 주변 친구들의 배려 속에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교수로서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98년 사면복권되면서 정식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가 되었고 2006년 정년퇴임을 한 후 현재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하고 있다.
그는 글과 강연으로 많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감동을 주었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책이다. 그는 감 옥에서의 신산한 삶을 오히려 따뜻한 위로와 성찰의 메시지로 담아 가족들에게 전했고 1988년 이 편지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수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고 지금도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 책은 신영복이 현실과 민중을 만나며 창백한 지식인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식과 삶을 재구성하 며 낮지만 깊은 지혜의 세계로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영복 교수는 두 번에 걸쳐 국내와 국외 기행기를 신문에 연재한 바 있는데 그 결 과로 나온 책이 국내 여행기인 《나무야 나무야》(1996)와 해외 여행기인 《더불어 숲》 (1998)이다. 이 두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깊은 역사의식과 창의적 상상력으로 역사 속의 인물과 장소를 ‘지금 현재’의 역사성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포획하는 놀 라운 지적 통찰의 기록이다.
신영복 교수가 쓴 또 하나의 명저는 《강의》(2004)다. ‘나의 고전 독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그가 오랫동안 강의해 온 동양 고전들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 담겨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사회과학자가 오랜 수형 생활 속에서 새롭게 동양 고전을 공부 하고 사유하며 이루어낸 장강과도 같은 지혜가 이 책 속에 있다. 유려하고 짧은 단문으로 마치 화두를 던지듯 쓰인 그의 글들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끊임없이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 한다.
신영복 교수의 지혜와 사상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단지 그의 책들을 통 해서만이 아니다. 짧지만 놀랍도록 함축적인 지혜가 담긴 그의 글씨와 그림은 그의 사상 을 접할 수 있는 또 하나 중요한 매개체다. 신영복 교수는 어릴 적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 진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물론 그가 좀 더 깊은 공부를 한 건 감옥 에서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어깨동무를 한 듯 기대고 있는 그의 독특한 글씨는 시민단 체들의 현판과 벽을 장식하고 있다.
“처음처럼” “더불어 숲” 등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문장에 특유의 통찰과 지혜를 담아내는 그의 서화작품들은 시민들에게 평화와 민주, 생명과 공존, 화해와 연민의 메시지 를 전하는 잠언들이다. 신영복 교수는 탁월한 강연자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그는 전국의 수많은 지역과 단체, 학교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많은 시민에게 낮고 고요하지만 치 열하고 풍요로운 성찰과 희망의 언어를 전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사상은 “더불어 숲”이 라는 글귀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힘과 대결, 경쟁과 승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존과 평화의 의미를 전하는 그의 언어는 책을 통해, 강연을 통해 이 시대의 등대가 되어주고 있다.
신영복 교수는 우리 사회가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도록 일깨워주면서, 공동체적 삶을 조용히 실천해왔다. 몇 번의 서화전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또 ‘처음처럼’이란 소주 글씨를 써주고 받은 1억 원을 대학에 장학금으 로 내놓기도 했다.
지난 2008년 청명문화재단이 제정한 임창순상을 받았는데 당시 청명문화재단은 선 정 이유를 “다양한 개인과 계층과 문화가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사랑과 화합의 공동체 를 향해 나아가는 신영복의 따뜻한 분노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울림과 더욱 넓은 어울 림으로 번져 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2. 수상소감
만해대상(萬海大賞)과 같이 실제 인물의 실명을 상명(賞名)으로 하는 경우에는 다 른 상과 달리 수상자의 부담감이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2015년 만해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적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상이란 수상자가 그 상의 빛을 더하지 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누를 끼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는 준거로서 그 사람의 삶에 그 시대가 얼마나 함축되어 있 는가 하는 것이 평가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만해는 새삼스레 그 생 애를 재조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준거로 볼 때 그 시대를 정 직하게 살고 가신 분입니다. 그 시대의 모순과 아픔의 한복판을 오연히 걸어가신 분입니 다.
이번의 수상은 나로서는 기쁜 것이기보다는 상처가 되살아나는 아픔이었습니다. 행 여 모순의 현장과 아픔의 유역을 비켜가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상을 받기보다는 벌을 받는 것으로 일생을 끝마치려고 하고 있기 도 합니다. 벌을 받고 떠나는 삶이 우리 시대의 수많은 비극의 사람들에게 그나마 덜 빚지 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반성과 아픔을 다스릴 만한 세월이 내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해 당시와는 엄청나게 변해버린 오늘의 현실이 낯설기까지 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 모순과는 달리 냉전시대의 남북분단이라는 민족 모순은 그것의 구조에 있어 서도 판이하고 또 그 모순에 대한 사회적 인식마저 판이합니다. 만해를 역사 속의 과거 인 물로 맞이하는 것이 만해대상의 참뜻이 아니라면, 만해를 오늘의 현실 속으로 생환하는 일이 만해대상의 참뜻이라면 나로서는 수상 자체가 또 다른 의미에서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의 최고치는 나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불러와서 치열하게 추 체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조감하는 계기는 결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님 은 물론입니다. 만해대상 수상을 계기로 세월과 함께 무디어진 그동안의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서슬 푸르게 벼르는 계기로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합니다.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한테 알려주지 않고 심사 자료를 정리하고 제출하는 등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학교 당국과 동료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2015 
정현종.jpg
제19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 정현종 (시인)

1. 수상자 선정 이유
정현종(1939~  )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50년 동안 한 국 시의 사유와 감각에 신생의 탄력을 부여해온 한국 문단의 대표적 시인이다. 시인은 그 특유의 철학적 사색과 섬세한 감각으로 독자적인 시 세계를 형성해왔는데, 그 세계는 육 체성에 대한 발견과 생명에 대한 매혹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유와 감각을 밀도 있게 결속해온 그만의 영역이라 할 것이다.
그는 첫 시집 《사물의 꿈》(1972) 이래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에서 인간적 비극의 결핍 상태 곧 죽음이라든가 실존적 비 극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천착을 노래해 왔다. 그러다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에서는 사람살이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형상들을 표출하더니 1990년대 이후 잇따라 펴 낸 《한 꽃송이》(1992) 《세상의 나무들》(1995) 《갈증이며 샘물인》(1999) 《견딜 수 없네》 (2003) 《광휘의 속삭임》(2008)에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들의 충일감을 가멸차게 노래하였다. 가장 최근에 펴낸 《그림자에 불타다》(2015)에서는 시가 타자를 향해 퍼져 나 가는 마음을 담아내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개개 시편에 나타난 ‘생명’과 ‘꿈’과 ‘ 느림’과 ‘음악’과 ‘찬탄’과 ‘애도’의 물줄기는 이러한 세계들을 파생시켜가는 확연한 실물적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시는 결핍에서 충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비극성에서 넘쳐흐르는 활력으로 전이해간 역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현종 시인은 ‘꿈’과 ‘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사실, 시인의 꿈꾸기에 대한 욕 망이 그치지 않는 한 사물들은 살아 움직이고 그 꿈이 다하면 사물들도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생명력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는 절창으로 이어진다. 이때 우리는 ‘섬’의 의미가 무엇인 가를 명시적으로 따진다는 것이, 마치 만해(萬海)의 ‘님’이 무엇인가를 산문적으로 따지는 것만큼 공허한 일임에 상도한다. 말하자면 그리움의 대상(“섬”)보다는 그리움 자체(“가고 싶다”)가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 획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꿈이라는 것을 시인이 에둘러 강조한 것임을 알게 된다.
시인은 삶의 불모성과 비극성을 푸는 방법론으로 ‘육체에 기반을 둔 사랑’ 곧 에로스 의 시적 발견에 힘을 쏟았다. 그 후 1990년대 들어서 발표한 시집들에 줄곧 담긴 명징하고 도 구체성 있는 생명의 시편들은 그의 시 안에 담긴 철학성의 본질을 새삼 되묻게 만들었 고, 그 결과는 한국 시의 자기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의미 있는 진경이라는 평가를 불러왔 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후기 시편들에서 집중적인 생태적 상상력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그의 후기 시는, 시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지식과 욕 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데 있다는 것이라는 착상에서 비롯하여, 그것을 두루 실험하고 완성하는 구체적 실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만큼 그의 시편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관(感官)을 자극하 게끔 하고 인지적, 정서적 충격과 반응을 풍부하게 가지게끔 하는 ‘언어의 샘’이 되어주었 다. 그 점에서 정현종은 우리 문학사에, 생명의 황홀을 노래하는 우주적 상상력의 참모습 을 보여준 범례로 길이 남을 것이다.
정현종 시인은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와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수많은 후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크리슈나무르티 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1979)와 네루다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 의 노래》(1989), 《100편의 사랑 소나타》(2002), 《충만한 힘》(2007) 등이 있다. 이러한 정 현종 시인의 탁월한 문학적 업적과 창작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여 2015년 만해문예대상 수 상자로 선정한다. 

2. 수상소감
오늘은 우리가 항상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에 관해서 같이 생각해 볼까 합 니다. 모든 건 마음이 만든다는 잘 알려진 불교의 진리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추상적인 지 식이나 남의 일이 아니라 ‘자각’으로 지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세상에는 불행 하고 한심스럽고 슬픈 일이 끊이지 않으니 말씀이지요.
마음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 고 하지만 또한 마음 이외에 믿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무 뎌지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고 마음이 맑고 밝은 상태로 살아 있게 하는 것도 마음이 하 는 일입니다.
예술, 종교, 학문 활동은 필경 저 살아 있는 마음을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생명과 자 유와 평화를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마음의 분출을 보여주는 것이겠고요. 예술 작품이 한껏 밝고 맑은, 따라서 동시에 모든 걸 느끼는 살아 있는 마음의 분출이면 더없이 다행한 일이겠고요, 또한 그러한 정신이 정치나 사회 등 여러 활동에서도 작용한다면 더 없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예술가에게 ‘살아 있는 마음’이 요구되는 까닭은 그가 하는 일이 이 세상을 좀 더 영예로운 쪽으로 고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정치는 권력을 좇고 경제활동은 돈을 좇는 것이니 그러려니 한다고 하더라도, 예술 하는 사람이 돈이나 권력 감에 그 정신이 마비되거나 헛된 명성에 도취되어 제정신을 잃을 때 우리를 더욱 실망시 키는 이유는 예술 활동이 가진 본래의 특성-청정한 데서 솟아나는 영감으로 작품을 만든 다는 것 때문이지요.
하기는 우리의 마음은 조금만 게으르면 혼돈 속을 헤매기 십상이지요만, 그러니만큼 예술가는 세상에서 자기의 역할에 비추어, 다른 게 아니라 항상 꿈과 각성에 취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상상력의 탄력은 사물을 무한 속에 있게 하며, 분별력의 기율은 인간 세상의 괴로움을 줄일 터이기 때문입니다.
만해 한용운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생 각하고 그리워하는 ‘살아 있는 마음’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 다”(〈고대〉)라고 했을 때의 그 ‘당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시를 쓰는 일이 그러한 마음을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행위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5 
신영복.jpg
제19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 황병기 (명인)

1. 수상자 선정 이유
가야금 명인 황병기(79)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중학교 때 처음 접한 가야금을 필생의 업(業)으로 삼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우리 창작음악의 1세대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 로 있다가 2001년 정년퇴임을 했고,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황 명인의 업적은 우선 가야금 연주와 창작 분야에서 빛난다. 스승에게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으로 알았던 가야금 음악을 익힌 후, 〈숲〉 〈영목〉 〈고향의 달〉 〈미궁〉 〈산운〉 〈 하마단〉 〈침향무〉 〈비단길〉 등 수많은 가야금 레퍼터리를 짰다. 1974년 유럽 공연을 앞두 고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리그릇에서 영감을 얻은 〈비단길〉, 백제가요 〈정읍사〉에서 소재를 딴 2007년 작 〈달하 노피곰〉까지 그의 작 품을 들어보면 우리 소리의 유산을 껴안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걸작들이다.
작년에도 여섯 번째 창작 음반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를 낼 만큼,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한다. 황 명인의 스승인 김윤덕 선생이 1946년 정남희(1905~1984) 에게 배운 47분짜리 가야금 산조를 바탕 삼아 황 명인이 다스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 등 8부분으로 구성한 곡이다. 보통 가야금 산조의 2배 가까운 70분 분량이다. 여섯 장의 창작 음반을 낸 황 명인은 “내 작품은 똑같은 것이 하나 도 없다. 자기 복제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
황 명인은 국악계의 간판스타로 국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앞장서왔다. 1965년 하 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예술제’에서 초청받아 연주했다. 이때 호놀룰루 심포니와 협연 하고 녹음한 음반(LP)에 대해 음악 전문지 《스테레오 리뷰》는 ‘하이스피드 시대의 현대인 에게 정신적 해독제와 같은 음악’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 미국, 영국, 네덜란드, 핀란드, 일본, 중국, 프랑스, 알제리, 이탈리아, 스위스 등 전 세계 주 요 공연장에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1990년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남측 대 표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송년 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국내 최고 권위의 국악상인 방일영국악상(2003년, 제10회)을 받았다. 방일영 국악상 심사위원회는 “황병기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가야금 명인이자 국악 작곡가로서 뛰어난 연주와 주옥같은 창작곡으로 국악의 아름다움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고,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바탕으로 국악의 현대화·세계화·대중화에 앞장서 왔을 뿐 아니라 대학 강단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등 우리 전통음악의 계승과 발 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황 명인의 업적은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2013년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 대 학(SOAS)이 발간한 《황병기-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 작곡가》는 황 명인의 가야금산조 와 1960년대 이후 음악 세계를 분석한 것으로 서구 학계에서 아시아의 전통 음악가를 다 룬 영문 연구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전통 예술인의 입장에서 읽은 고전 《논어》를 담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 가락》과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오동 천년, 탄 금 60년》 등의 저서를 통해 국악의 아름다움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2. 수상소감
제가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제 정된 만해문예대상을 받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수상을 계기로 만해 한용운 선생과 가까운 인연을 맺게 된 것 같아 설레면서도 황공한 생각이 듭 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만해의 《님의 침묵》을 애독해 왔으며, 이 시집을 지금도 저 의 서재에 꽂아두고 읽고 있습니다.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가곡으로 작곡하기도 했 고, 〈찬송〉을 아악의 명곡 〈보허자(步虛子)〉의 가사로 붙여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은 그의 시 못지않게 유명하지만, 저는 《님 의 침묵》의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를 읽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일부를 인 용하면,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 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시인의 그 겸허함에 머리가 절로 숙어집니다.
저는 팔십 평 생을 가야금을 하면서 평범하게 살아온 음악가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만해대상을 받는 것은 참으로 과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저의 힘이 닿는 한 더욱 열심히 가야금을 연마하는 길만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뜻에 조금 이라도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DB_banner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