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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공동체)

1. 수상자 선정 이유서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 종로에 위치한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작지만 아주 큰 집회가 열린다. 조용한 외침! 허리 휘고 주름투성이인 할머니들의 외침은 단 한 번도 일본 대사관의 문을 열게 한 적 없다. 하지만 그 가녀린 파도는 너울너울 현해탄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 세상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며 인권과 평화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묻고 또 묻게 한다.

1992년 1월 8일부터 한 주도 쉬지 않아 2014년 1월 현재 1,100회가 넘은 이 집회의 주체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은 집회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일본의회 사죄 결의,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에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을 외치고 있다.

할머니들의 외침은 일본의 사실인정과 배상, 그리고 인류사에 있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참담한 인권유린과 평화의 파괴에 대한 경각심이다. 어린 나이에 강제로 혹은 속임에 빠져 전장으로 끌려가 온갖 능욕을 당했고 종전 이후 그대로 방치되거나 버려져 고향에 돌아올 수도 없었던 참혹한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죽는 날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는 할머니들의 실존일 뿐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역사의 실상이다. 그래서 집회 1,000회를 맞아 시민 모금으로 그 자리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맞으며 할머니들의 외침을 온몸에 새기고 있다.

나눔의 집이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마을에 둥지를 튼 것은 1995년 12월이었다. 그 이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문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제기됐다. 1991년 8월 14일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을 공개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오늘날 동회에서 주는 쌀 10Kg, 돈 3만 원에 매달려 한 달을 사는 불쌍한 늙은이가 된 것은 내가 정신대였기 때문”이라고 한 맺힌 사연을 공개하면서부터 이 문제는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이슈가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불교인권위원회가 적극적인 행동으로 참여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전셋집을 얻어 피해 할머니들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었고 명륜동과 혜화동의 전셋집을 전전하다가 한 불자의 기부로 광주군 퇴촌면 현재의 자리에 나눔의 집이 들어섰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과거는 ‘피해자’로 앉아만 있기에 너무나 참혹했다. 그래서 평화와 인권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데 마지막 목숨을 바치고자 떨쳐 일어섰다. 나눔의 집에 입주하면서부터 손수 그린 그림들을 국내외에 순회 전시하며 인권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고, 일본과 미국 등지를 찾아다니며 역사의 진실을 증언했다. 미국에서 그림전과 기자회견을 열고 각종 학술대회에 참여했고, 일본에서도 그림전을 열고 각종 집회를 주도하고 법정에서 증언도 했다.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캄보디아의 훈(이남이) 할머니와 중국에 거주하던 피해 할머니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등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원근을 가리지 않는 ‘찾아가는 역사관’과 해외증언 집회는 나눔의 집을 세계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나눔의 집은 생생히 살아 있는 교육현장이다. 해마다 일본의 청년들이 찾아와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숙박하며 과거를 공부하는 피스로드 캠프가 열리고, 인권 캠프와 각종 콘서트, 문화 퍼포먼스,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된다. 나눔의 집이 모태가 되어 세계 최초의 인권 테마박물관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과 ‘국제평화인권센터’가 설립되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약값과 용돈을 모은 재산을 장학금과 인권운동 기금 등으로 희사하는 뉴스는 거듭거듭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2014년 6월 현재, 국내 피해자로 신고된 237명 가운데 생존자는 54명. 나눔의 집에는 김순옥, 박옥선, 이옥선, 김군자, 강일출, 유희남, 김정분, 정복수, 김외한 등 9명의 할머니들이 거주하며 원장 원행 스님과 안신권 소장의 도움으로 각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지울 수 없는 역사, 왜곡할 수 없는 진실의 현장이다. 그곳에는 국내 각계의 인사들과 세계적 저명인사들도 찾아오지만, 일본의 대학생과 정치인들도 찾아온다. 와서, 할머니들과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이분들의 눈물이 마를 때, 나눔의 집은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성소(聖所)가 될 것이다.

2. 수상소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시고, 평화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사상과 정신이 살아 있는 ‘만해평화대상’이라는 큰 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자, 여성의 수난사입니다. 일제강점기 어린 소녀들은 일본군에 강제연행되어 가장 끔찍한 범죄를 당한 피해자입니다. 소녀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귀국하였으나,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회적인 냉대와 차별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고백을 통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였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실천적인 행동으로 ‘수요집회’와 국내외 ‘증언집회’를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1992년 1월부터 현재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수요일 정오에 가장 평화적인 ‘수요시위’와 미국 하원 청문회, 유엔 인권이사회, 국제노동기구, 2000년 도쿄 민간법정, 일본 참의원 회관, 일본 청년관, 독일, 프랑스, 호주 등 전 세계 ‘증언집회’는 세계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유엔 인권이사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전쟁범죄이자 인권유린사건이라 규정했고, 국제노동기구(ILO)는 미성년자 강제노동이라 규정했으며, 국제고문방지위원회는 일본정부의 공식사죄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0년 도쿄 민간법정에서는 일본 천왕을 전범으로 기소했고, 2007년 미국 하원에서는 일본의 공식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습니다.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님의 피해자 고백 이후, 많은 분이 줄을 이어 일본의 범죄 사실을 고백하고 정부에 피해자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피해자 스스로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대부분 결혼을 하지 못해, 보호자나 수발자도 없고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해, 1992년 10월 사회복지법인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설립자 및 대표이사 송월주)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해결하기 위해 1998년 나눔의 집 부설로 세계 최초 인권 테마박물관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까지 피해자들께 공식사죄와 법적 배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인권문제이자 평화를 외치는 ‘못다 핀 꽃’들에게 ‘만해평화대상’은 가장 큰 상입니다. 20세기 가장 불행했던 여성들이 이제는 가장 용감하고 위대한 여성인권활동가로 인정받는 상이라 생각합니다.
상금은 또 다른 인권을 생각하고 세계활동가를 위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인권센터’ 건립기금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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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만해실천대상 수상자 - 이세중 (한국, 변호사)

1. 수상자 선정 이유
이세중(79) 변호사는 평생 시민사회운동을 통해 변호사들의 사회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존경받는 원로 법조인이다.
1956년 제8회 고등고시 행정 및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계에 들어선 이 변호사는 판사 생활을 거쳐 1963년 변호사로 전업한 이후 지속적으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선진화로 나아가는 동안 미처 정비되지 못한 약한 고리를 먼저 찾아 이어주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투명한 원칙을 세워왔다. 우리 나이로 팔순에 접어든 고령이지만 이 변호사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좌우 이념을 넘어서 인권, 환경, 경제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현안해결에 앞장선 그의 활동은 과거 ‘돈 잘 버는 직업’ 정도로 인식됐던 변호사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 변호사는 우리나라 인권변호사 1세대로 불린다. 시민사회운동의 첫걸음은 유신시대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에 대한 무료 변론이었다. 1970년대 유신 긴급조치 발령에 따라 지식인들의 구속과 투옥이 줄을 잇던 당시 이 변호사는 무료변론에 나섰다. 법대생 시절 마음에 새겼던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구절을 다시 떠올린 것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 재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자금 사건’ 등 시국사건의 변론엔 이세중 변호사와 홍성우, 황인철, 강신옥 변호사 등이 단골로 포함됐다. 독재의 서슬에 모두가 숨죽이던 당시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는 온갖 겁박이 뒤따랐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당했고, 미행과 전화도청도 이어졌다. 당시 정보부 사람이 “변호사 본래 업무나 열심히 하지, 왜 이렇게 어렵게 지내느냐”며 회유와 협박을 했다는 게 이 변호사의 증언이다. 1987년 서울변협 회장과 1993년 대한변협 회장을 역임한 그가 2010년 대한변협 인권재단 이사장에 선출된 것도 이 같은 공적에 비춰볼 때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인권변호사 경력에 활발한 시민사회운동을 펴온 이 변호사의 활동은 정치권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역대 정권과 정치권은 잇달아 그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항상 “노(No)”였다. 일단 한 번 몸을 담그면 이상을 실현하기보다는 잘못된 풍토에 젖어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상을 실현할 무대를 시민사회운동에서 찾았다. 유신시대와 5공화국 시절 민주화와 인권이 주된 관심이었다면, 민주화 이후 이 변호사는 우리 사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고 투명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보폭을 넓혔다. 정치, 경제는 물론 환경문제까지도 모두 그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 분야만 해도 1992년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1995년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경제 투명화를 위한 노력은 1988년부터 시작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활동으로 두드러진다.
우리 사회에서는 선구적으로 환경문제에 주목했던 이 변호사는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시작으로 환경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입법, 행정체제의 정비를 촉구하는 한편 사법부 역시 전향적인 판결을 내리도록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밖에도 심각한 묘지난과 산림훼손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매장문화를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서 해결하기 위한 한국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 이사도 역임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역임한 데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그가 몸담았던 시민사회단체의 면면을 보면 매번 당시 우리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약한 고리’였음을 알 수 있다.
나눔에 대한 그의 철학은 “나눔이란 단순히 가진 것 일부를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사회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다. “변호사가 자기 이익에 치우쳐 ‘사업적 성공’에만 매달리면 이웃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성공이다. 변호사들이 ‘나눔’을 통한 성공을 배우길 바란다”는 게 그가 생각하는 성공한 변호사의 길이다.
평생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며 우리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매진해온 이 변호사는 스스로 “금전적으론 성공하지 못한 변호사”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변호사가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은 “조그만 능력이라도 이웃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2. 수상소감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만해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만해 선생은 투철한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의 선각자로서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탁월한 시인이며 문학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깨우치셨습니다.
특히 거의 100년 전에 펴낸 저서에서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고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사해(死骸)와 같고 평화가 없는 사람은 최고통(最高痛)의 자라”고 주장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해 선생께서 자유와 평화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역설하시면서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은 오늘의 현실에도 부합하는 귀중한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자유와 권리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향상되지 아니한 시대에 이미 위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남긴 업적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의 지나친 이기심과 남을 배려하는 데 인색한 우리 현실에 바로 적용되는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해 선생께서 주신 교훈을 통해 우리 사회에 참된 자유와 평화가 정착되어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발전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만해 선생의 선각자적 가르침에 항상 감명받으며 생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저로서는 만해사상의 실천에 매우 미흡한 점이 많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입장입니다.
만해 대상은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저를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만해대상 심사위원회 김희옥 위원장님과 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만해사상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만방에 널리 확산되기 바라며 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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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 모흐센 마흐말바프 (이란, 영화감독)

1. 수상자 선정 이유
이란의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 57)는 세계적인 명장이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한결같이 수작이거나 걸작이다. 그의 삶의 행보는 저항으로 일관해 왔으며, ‘영화는 특정계층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특유의 영화적 노선으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흐말바프는 정치적 행동가(Political Activist)이다. 마흐말바프 감독을 그렇게 규정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인생 이력 때문이다. 그는 1957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 빈민가에서 태어나, 17세의 나이에 반정부 이슬람조직에 가담하여 경찰 살해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1979년 이란혁명으로 6년의 수감생활을 마무리하고 석방되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은 그를 영화감독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끝없이 사랑하는 휴머니스트로 만들었다.
마흐말바프 감독이 오로지 정치적 행동가의 길로만 치달은 것은 물론 아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10대 때부터 팔레비 독재 왕정에 항거해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팔레비가 실각하고 호메이니가 집권한 1980년대에 접어들며 단편소설과 희곡, 시를 쓰는 등 문화예술 활동에 뛰어든다. 1982년 〈노수의 회개(Nassouh's Repentance)〉로 영화감독으로 데뷔, 1980년대를 거치며 〈페들러〉 〈사이클리스트〉 〈축복받은 결혼〉 등을 통해 이란 뉴웨이브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명성을 굳힌다. 시인이자 감독으로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마흐말바프 감독 영화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전작들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탐미적 수작 〈가베(Gabbeh)〉가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이면서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1996년 국내 개봉되며 불기 시작한 이란 영화 바람의 연장선에서였다. 〈가베〉를 통해 한국 팬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그는, 제9회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예술공로상을 받았다. 1998년 작 〈고요〉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다. 대표작으로 〈순수의 순간〉(1996), 〈칸다하르〉(2001), 〈섹스와 철학(Sex&Philosophy)〉(2005), 〈개미의 통곡(Scream of the Ants)〉(2006)  등이 있으며, 2012년 발표한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신작 〈정원사(The Gardener)〉는 제17회 부산 국제영화제의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되었다.
마흐말바프의 영화관은 영화가 특정계층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 예술가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던 그는 1986년 이란의 도시 빈민촌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영화 〈페들러(The Peddler)〉로 국제영화제의 주목을 받았다.
1987년에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다룬 〈사이클리스트(The Cyclist)〉 이후,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결합된 〈칸다하르(Kandahar)〉(2001)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하의 절망적 현실을 조명해 〈타임〉으로부터 ‘올해 최고의 영화’로 선정됐다. 이 영화는 2001년 그리스에서 개최된 제42회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의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비롯하여, 제54회 칸영화제 에큐매니컬상(기독교심사위원상)과 페데리코 펠리니 상, 몬트리올 누보시네마 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하였다.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 교육과 문화재건 운동에도 전력을 기울여 왔다. 또한 2007년 제12회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주최한 단편영화 제작교육 프로그램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의 교장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마흐말바프 가족은 모두 영화감독으로 유명하다. 부인인 마르지예 메쉬키니(Marzieh Meshkini) 감독은 이란 여성의 고단한 삶에 풍부한 은유와 상징, 유머를 곁들인 〈내가 여자가 된 날〉(2000)로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신인작가상), 제36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실버휴고 최초필름상, 제22회 낭트 3대륙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장녀 사미라 마흐말바프(Samira Makhmalbaf)는 데뷔작 〈사과〉(1998)를 발표하면서 곧바로 유망주로 떠올랐고, 〈칠판〉(2000)으로 제53회 칸 영화제, 〈오후 5시〉(2003)로 제56회 칸 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또 2004년에는 제5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차녀인 하나 마흐말바프(Hana Makhmalbaf) 또한 14세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 〈광기의 즐거움〉(2003)을 연출, 제6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최연소 감독으로 참가했으며, 제4회 도쿄필름엑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이후 2007년 〈부처는 수치심 때문에 붕괴되었다〉로 제34회 겐트 영화제 그랑프리, 제55회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차지했다.

2. 수상소감
넬슨 만델라 같은 위인들이 수상했던 만해대상을 나도 받게 되어 큰 영광이다. 덕분에 내 여정에 들인 노력이 더욱 보람되지만, 내게 새로이 부과된 책임도 느껴진다. 상은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든 사람의 노고를 잊지 않기 위해 그에게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으며, 상을 받는 사람은 자신에게 비치는 빛으로 자신이 행동을 하게 된 계기를 다시 밝혀볼 수 있다.
만해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란에 있던 7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이 언젠가 학교에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흘렸던 눈물을 떠올렸다. 
 나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영화 〈아프간 알파벳〉을 제작했고, 이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다. 나는 〈아프간 알파벳〉을 통해 난민 아이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꾸고 있는 꿈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영화가 상영된 후, 이란의 학교들은 50만 명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을 학생으로 받아주었고, 이에 따라 아이들의 얼굴에 있던 슬픔과 눈물은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다. 만해대상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이 모든 아프가니스탄 난민 아이들이 거친 고난도 함께 비춰주는 조명이다.
나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종교적, 민족적 소수자들이 외치던 절규도 기억한다. 그들은 오랜 시간 그들과 종교나 민족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정부의 정책에 의해 압박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나는 영화 〈정원사〉를 제작해 이들이 매일 겪는 역경을 공개하고자 했다.
또한, 내게는 그저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 및 관용을 얻기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정치범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있거나 가택 연금을 당한 친구들도 많다. 예를 들어 남편 미르 호세인 모우사비와 함께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택 연금에 처해진 시인이자 화가 자흐라 라흐나바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조계종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의 이름을 딴 영예로운 만해대상이 만델라 같은 위인에게 수여되는 것은 마치 빛에 다시 조명을 비추는 것, 혹은 서로 마주 보고 있음으로써 미를 무한하게 극대화시키는 거울 두 개와 같다.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불평등으로 점철된 어두운 세상, 60년간 지속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세상에 사는 오늘의 우리에겐 이러한 밝은 빛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는 언젠가 만해대상이 서로를 죽이는 대신 포용함으로써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두 청년에게 수여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는 승객들이 공항에서 수차례 조사받고, 사적인 통화 내용을 도청당하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무인비행기가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들을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오히려 세상의 안전과 안정을 위축시키고 있다. 우린 바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그 무인비행기들이 철새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하는 날, 그로써 그 비행기들의 제작자가 만해대상을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영예로운 만해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크나큰 영광이며, 세상의 어둠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It is an absolute honour to receive such a prestigious award. Specially when this award previously has been given to major icons like the great Nelson Mandela.
Besides the joy that comes with receiving this award, that make my life time effort on this journey more meaningful, I also feel the burden of a new responsibility on my shoulder.
I tell myself: “ Awards are like spotlights put on a person and their efforts so that mankind would not forget about the role models and their contribution for a better world. But at the same time while receiving these awards one can reflect this light back on the issues and problems that has been the incentive behind all their efforts and actions.
With the same thought, while receiving this award I remember the sadness and the cry on the faces of 700,000 Afghan children refugee in Iran whom dreamed of being allowed into the school one day.
I, with the help of my fellow colleagues, by making the film Afghan Alphabet managed to change the law in favour of these innocent children. With this film I tried to explain their situation and put the light on their agony and potential dreams. After this film the door of Iranian school was opened to over 500,000 afghan children. That sorrow and cry on those children faces soon was transformed to a smile and scream of happiness.
This award is not just a spotlight on me but a big reflection on all those pain and dreams experienced by all those afghan children refugees.
I also remember the scream and suffering of religious & ethnic minorities in Iran and Afghanistan. All those people who have been under the pressure of politics and other ethnic & religious majority groups for such a long time. By making a film like the Gardener I have tried to put the light on these fellow human being and the pain they are going through on a daily basis.
I also remember a lot of my long time friends who are under torture in political prisons in Iran, or the ones who have been under house arrest for a long time. Those friends who have done nothing wrong but peacefully fighting for democracy and tolerance in our society. Specially I remember the poet and painter, Mrs Zahra Rahnavard, who has been under house arrest for more than three years alongside her husband Mr. Mir Hossein Mousavi.
This significant Manhae Prize, which is named after the reformist Buddhist poet, being given to people like the great Mandela is like a light being put on another light. Or it can be seen as two facing mirror which reflect the beauty to the infinity.
Today we are in great needs of these lights. Specially in an often dark world full of economical, political and cultural inequalities. It is in the same dark world that for the past 60 years mankind has been unable to sort the conflict between the Israel and Palestine. I wish for the day that the Manhae Prize could be given to two Israeli and Palestinian kids whom instead of killing one another; embrace each-other and start the true peace.
We live in an often dark world where all its passengers gets checked many times in airports, their private conversations over the phone are hacked and checked. In a world that its pilotless airplanes kill people with no mercy in search of a better and safer world. But in a converse effect our safety become more fragile than before. I wish for a day when we could give this award to the creator of those pilotless airplanes, whose airplanes give food and water to the tired migrating birds on the sky.
I, with great honour, receive this sunlike “Manhae Prize” to be able to share it with all those people who peacefully fight with the darkness in our world.
Mohsen Makhmalb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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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 아시라프달리 (이집트, 작가/언론인)

1. 수상자 선정 이유
아시라프 달리(Ashraf Dali, 51세)는 현재 이집트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국립 카이로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90년부터 《알 마나 매거진》(이집트) 편집장을 시작으로 《아라비안 애드버타이징 매거진》(오만) 편집인, 《니즈와 매거진》(오만) 편집장, 《아랍와 나크드 매거진》(이집트 문학 및 비평전문지) 편집장, 로이터통신 문화담당 편집장(이집트)을 거쳐 현재는 《알 아라비 매거진》(쿠웨이트) 편집장 겸 〈아시아엔〉 아랍어판 편집국장 등 언론 활동을 통해 아랍권의 통합과 문명 간의 교류에 기여해왔다.
언론인으로서 활동 못지않게 문학인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는 1989년에 첫 시집 《바다의 속삭임(Washwashat Al Bahr)》을 출판한 이래 소설가, 시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시와 함께 소설을 발표하며 아랍 세계의 다양한 세계를 문학작품으로 출판하여 아랍과 비아랍권 문명의 가교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 중국 등 동북아는 물론,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타르스탄 등 중앙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등 서아시아 등 아시아 40여 개국을 방랑하며 문화 원형을 밝혀내어 시와 소설에 녹여내고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현지 언어를 연구하며 원주민 세계를 파고들어 시어로 승화시켰으며 문화 간 문명 간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문학―시와 소설―은 한마디로 세계문학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그는 통찰력 있는 견문과 다양한 국제경험을 바탕으로, 아랍어로 출판되어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17개 아랍국가는 물론 터키, 이란 등 21개 중동국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유럽 등 23개국에 걸쳐 50만 부를 판매하는 《알 아라비 매거진》 등에 시와 기행문, 그리고 소설을 연재하며 아랍문학을 널리 전파했다.  
아시라프 달리의 작품들은 스페인, 러시아, 터키, 이탈리아, 페르시아, 그리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됐다. 그는 한국, 러시아, 인도의 위대한 문학작품들을 아랍독자들에게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는 그가 아랍권과 비아랍권, 동서문명의 교류에 헌신한 결과다. 
그는 2009년 이후 아시아의 실크로드 도시와 아랍 각국 어린이들의 세계를 시로 구현해 《알 아라비 매거진》 등에 연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집트는 물론 요르단, 시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발간되고 있다. 아시라프 문학의 전파성과 확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폭넓은 행보를 보인 아시라프 달리는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만인보》 등을 비롯한 고은 시인의 시집을 아랍어로 번역해 아랍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는 《천일야화》에 익숙한 아랍권 독자들을 위해 ‘천명의 삶’으로 개명해서 번역했는데, 이러한 사례를 통해 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국에는 생소한 아랍문학을 소개함으로써 아랍과 한국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아시아, 더 나아가 지구촌의 문학을 하나로 이어가기 위해 걸어온 그의 발자취는 문학과 문학을 통해 인류의 행복을 추구한 만해정신과 궤를 같이한다고 하겠다. 그는 현재 한국에 사무국을 두고 있는 국제기구인 (사)아시아기자협회의 중동지부장이자 〈아시아엔〉 아랍어판 편집장으로서 양국 언론 및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키고 있다.

2. 수상소감
아시라프 달리(Ashraf Dali, 51세)는 현재 이집트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국립 카이로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90년부터 《알 마나 매거진》(이집트) 편집장을 시작으로 《아라비안 애드버타이징 매거진》(오만) 편집인, 《니즈와 매거진》(오만) 편집장, 《아랍와 나크드 매거진》(이집트 문학 및 비평전문지) 편집장, 로이터통신 문화담당 편집장(이집트)을 거쳐 현재는 《알 아라비 매거진》(쿠웨이트) 편집장 겸 〈아시아엔〉 아랍어판 편집국장 등 언론 활동을 통해 아랍권의 통합과 문명 간의 교류에 기여해왔다.
언론인으로서 활동 못지않게 문학인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는 1989년에 첫 시집 《바다의 속삭임(Washwashat Al Bahr)》을 출판한 이래 소설가, 시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그는 시와 함께 소설을 발표하며 아랍 세계의 다양한 세계를 문학작품으로 출판하여 아랍과 비아랍권 문명의 가교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 중국 등 동북아는 물론,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 러시아, 카자흐스탄, 타타르스탄 등 중앙아시아, 인도 파키스탄 등 서아시아 등 아시아 40여 개국을 방랑하며 문화 원형을 밝혀내어 시와 소설에 녹여내고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현지 언어를 연구하며 원주민 세계를 파고들어 시어로 승화시켰으며 문화 간 문명 간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문학―시와 소설―은 한마디로 세계문학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그는 통찰력 있는 견문과 다양한 국제경험을 바탕으로, 아랍어로 출판되어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17개 아랍국가는 물론 터키, 이란 등 21개 중동국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유럽 등 23개국에 걸쳐 50만 부를 판매하는 《알 아라비 매거진》 등에 시와 기행문, 그리고 소설을 연재하며 아랍문학을 널리 전파했다.  
아시라프 달리의 작품들은 스페인, 러시아, 터키, 이탈리아, 페르시아, 그리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됐다. 그는 한국, 러시아, 인도의 위대한 문학작품들을 아랍독자들에게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는 그가 아랍권과 비아랍권, 동서문명의 교류에 헌신한 결과다. 
그는 2009년 이후 아시아의 실크로드 도시와 아랍 각국 어린이들의 세계를 시로 구현해 《알 아라비 매거진》 등에 연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집트는 물론 요르단, 시리아 등 여러 국가에서 발간되고 있다. 아시라프 문학의 전파성과 확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폭넓은 행보를 보인 아시라프 달리는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만인보》 등을 비롯한 고은 시인의 시집을 아랍어로 번역해 아랍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는 《천일야화》에 익숙한 아랍권 독자들을 위해 ‘천명의 삶’으로 개명해서 번역했는데, 이러한 사례를 통해 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국에는 생소한 아랍문학을 소개함으로써 아랍과 한국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아시아, 더 나아가 지구촌의 문학을 하나로 이어가기 위해 걸어온 그의 발자취는 문학과 문학을 통해 인류의 행복을 추구한 만해정신과 궤를 같이한다고 하겠다. 그는 현재 한국에 사무국을 두고 있는 국제기구인 (사)아시아기자협회의 중동지부장이자 〈아시아엔〉 아랍어판 편집장으로서 양국 언론 및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키고 있다.
것이다.
Farming Words
On winning the Manhae Grand Prize 2014 in Literature
As a young boy, I used to visit my grandfather's village. There, my stay was a mixture of enjoying nature and tracing folk stories. I still remember the magical green carpet of fields, where everything flying over was white; the flocks of cotton travelling the pages of the blue sky's book, the birds of cattle egret jumping as ballerinas, and the dreams that were weaving my secret moments.
In those old days I thought to grow as a farmer, where life was easy, nature was generous and food was so tasty; something I couldn't be, when I failed in my first farming lesson.
I was told by my uncle to remove weeds out of his field; instead I cut the green pepper lines, and destroyed a whole harvest in its birthplace.
It was then when I decided to concentrate on something I know better; my words. I was a book worm; I am still, similar to that white silkworm eating green leaves of the tree where I used to rest in those old days.
But the fear of destroying good harvest grew with me. I was very keen about every single word, whether in writing poems, novels, articles, or even letters.
I believed in the power of words, their abilities to build a new world, and their capabilities to destroy another. Words are the heritage we leave behind. We still go after the words of our prophets, activists, poets, and novelists.
The words of Jesus, Mohammed, Confucius and Buddha shaped our beliefs. The phrases of Gandhi, Nasser and Mandela made our histories. The lines of Han Yong-un (Manhae), Rabindranath Tagore and Omar Khayyam candled our souls.
It is farming words that will grow someday, somewhere, giving others the chance to be inspired with. Could I be one of those word farmers? I will devote life to find the best words seeds, dig the suitable soils, and plant the right roots. 
Manhae shows me that seeds are grown. The life tree is fruitful. Following the path of the Korean activist, monk and poet Han Yong-un in life, love and literature will, will certainly come to a moment of truth.
And this is the moment of truth revealed for me, when I am recognized by the prestigious committee of Manhae, chosen for winning the Manhae Grand Prize in Literature 2014.
My first literary step to the good land of Korea was in 2008, when my first novel; Shamawes,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in Korean. Six years later, I feel that more of my words are grown here, on the trees of Namsan Mountain, in the farms of Korean villages, and in streets of old cities. It is a moment to celebrate with friends from Korea and the world.
Once I wrote;
“In the heavy rains,
no one feels,
a lonely drop of water”.
But today, I believe that such a drop is flocking together with its friends. We form the River Nile, the Han River, the Ganga River and other sources of live that will continue farming words. Our words.
Ashraf Aboul-Yaz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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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 윤양희 (서예가)

1. 수상자 선정 이유
서예가 윤양희(72세) 선생은 지난 50년간 교육자, 서예가, 전각가로서 영리나 시비를 떠나 선비정신으로 돌올한 예술적 성과를 이루며 후진을 양성해온 한국 서단의 중심인물이다.
선생은 1959년 한성기 시인으로부터 한글 서예와 문학 수업을 받았고, 서울에서는 철농 이기우 선생을 만나 서예와 전각을 사사했다. 연찬은 명첩과 명인의 임서와 모각이 중심이 되었으나 철농에게 사사 받는 동안 표현기법보다 예술인으로서 자세와 안목을 높이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호를 모암(茅菴)으로 쓰는 선생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창천초등학교에서 교육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경기상업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동안 선생은 서예와 전각에 일가를 이루어 1994년부터는 대구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겨 서예와 전각을 강의하며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오늘날 서예교육에 초석이 되는 매우 중요한 일을 했다. 당시 선생은 초·중고등학교의 미술과 교육과정 및 초등학교 미술교과서의 개발 책임자였는데 미술과의 목표와 내용을 선정하고 조직하면서 우리나라 전통미술을 보전하고 창의성을 계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중·고등학교 서예》(지학사), 《바른 한글서예》(우일출판사), 《중학교 서예》(우일출판사), 《쉬운 판본체》(우일출판사), 《중학교 미술 1,2,3》(지학사, 공저) 등). 그리고 초등학교 미술과의 서예가 4학년부터 시작되던 것을 3학년부터 시작하여 모필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선생의 《쉬운 판본체》는 입문 단계부터 학습 내용에 판본체를 도입하여 한글 서체의 다양화에 기여하였다.
1994년 이후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실기 중심의 교육내용을 체계화하고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여 학습의 효과를 높였고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등에 나타난 서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재직 중에는 교육부의 지원으로 남북한 미술교과서를 비교하여 교육 내용상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했다. 선생은 또 사회교육 프로그램으로 예술의 전당이나 일간신문사의 문화센터 강의에 참여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띠실회, 흰띠꽃네 등의 단체를 통하여 한글서예를 활성화시켰다.
특히 2010년 만해마을에서 개최한 단시조 한글서예전은 한글 서체의 새로운 시도와 다변화를 모색한 창조성이 돋보인 전시였고 서예의 소재를 확충하여 서단은 물론 일반에게 시조를 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암은 창작과 서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한국미술협회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선정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심사위원장, 동아미술제 운영위원·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7회에 걸친 개인전을 통하여 현대적 감각의 전서와 한인풍의 전각, 한글의 판본체 정립은 일월신(日月新)의 예술혼 속에 피어난 모암체(茅菴體)라 하겠다. 한국미술협회의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상, 동아미술상, 대한민국 통일서예대전 대통령상, 일중 김충현 선생 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일중서예상 대상 수상은 그의 작품 수준을 말해주고 있다.
선생의 전각 작품 중 대중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작품은 우리나라 지폐에 들어 있는 ‘한국은행총재’라는 사각 인장이다. 우리나라 지폐는 그동안 원형의 인장을 사용해왔으나 2009년 6월 23일 오만원권 발행부터 모든 지폐에는 모암 선생이 제작한 사각형 한국은행총재인을 사용하고 있다.

2.수상소감
아련한 기억이지만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엔 작은 연못과 늙은 소나무와 여러 가지 꽃나무가 있었고 높은 마루가 있는 서당에서는 항상 글 읽는 소리가 매미 소리처럼 들렸다. 할아버지는 글을 모르는 농부였으나 가끔 살포를 짚고 그 앞을 지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글방 아저씨는 늘 엄숙한 표정으로 큰기침을 하며 자기의 거동을 알렸다. 나는 가끔 글방 안에 들어가 먹을 갈아 마분지에 글씨를 쓰는 서생들을 보며 자랐다. 그러나 내가 거기서 글을 배운 적은 없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지 1주갑(周甲)이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동안 문방사우를 멀리해 본 적이 없고 늦었지만, 서예가가 되고 전각가가 되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끝을 맺었다. 그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갔고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몇 차례 상을 받았지만 상을 받는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내가 할아버지가 된 지금, 돌아가신 할아버님께 자랑하고 싶고 주변 사람들에겐 부끄러운 마음도 없지 않다. 사범학교에 들어와서는 서예 공부를 하면서 한글 서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고 싶은 공부였으나 여건이 따르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면서 대전문화원에서 처음 전시회를 가졌고 더 큰 욕심을 내게 된 것은 서울로 발령을 받은 후였다.
1962년 전시회에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썼고 그 후엔 《님의 침묵》의 〈군말〉을 작품으로 만든 기억이 새롭다. 그때는 ‘님’이 조국인지 연인인지 구분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국어교사가 되어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 등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고향의 고래실 논둑에는 매우 큰 박달나무가 있었다. 그 가지를 잘라 도장을 새기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는 전각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고, 박두진, 양명문 시인의 소개로 철농 이기우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때부터 전서를 익혀 전각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무렵은 전각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미미했다. 그러나 붓으로 쓰던 글씨를 칼로 새겨 돌에 표현하는 것은 새롭고 신 나는 경험이었다.
직장을 한국교육개발원으로 옮기면서 직무도 미술교육으로 바뀌어 교육과정을 개정하거나 교수·학습방법 연구, 교과서 개발 등을 통해 서예 교육의 방법이나 내용의 개발에 힘써 왔다. 우리나라의 서예 교육은 궁체 쓰기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 15세기 국어의 한글 자형을 바탕으로 한 판본체를 도입하고 전서의 용필을 통한 서예표현의 입문방법을 제시하였다. 2001년에 펴낸 《쉬운 판본체》는 판본체의 이론과 표현 학습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교과서적 관점에서 집필하였다. 대학의 강단에서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와 연구 결과를 현장에 적용하는 기간으로 보람과 즐거움을 함께하였다.
서예는 그 사람(書如其人)이라 했다.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心正則筆正)고도 했다.
나는 이 말을 믿지 않지만 그러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서예는 형사(形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 속에 있으며 가슴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음으로 청고 고아한 뜻이 서린다. 중국의 오창석은 아사조화(我師造化)라고 했다. 서예는 한 점 한 획의 조화, 글자와 글자의 조화, 자간과 행간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아름답게 표현된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나이나 인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모름지기 예술적 표현에는 방법이나 기술이 있어도 그 형태는 사뭇 다르다. 나는 오랫동안 작업을 하면서 고전적 바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화려함을 탐내지 않았다.
뽑아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앞으로 더욱 고졸한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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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만해대상 특별상 수상자 - 손잡고 (노란 봉투 캠페인 동참시민들)

1. 수상자 선정 이유
‘손잡고’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손해배상금 47억 원을 십시일반(十匙一飯) 나눠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한 시민 캠페인이다.
올해 초 한 시사잡지에 어떤 여성이 편지를 보냈다. 쌍용자동차와 경찰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노조가 47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펜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저희는 양가 부모님께 500만 원만 도움을 받은 채 사실상 맨주먹으로 2008년에 결혼했습니다. 카드 할부로 혼수도 장만하고, 부끄럽게도 그 나이에 2천만 원밖에 모으지 못해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80만 원으로 신접살림을 시작했지요. 맞벌이를 하고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도 한 번 안 가는데도 부모 도움 없이 이 땅에서 생존이 가능한가를 늘 자문했답니다. 저의 본론은…… 해고노동자에게 47억 원을 손해 배상하라는 이 나라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입니다. 47억 원……. 뭐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들겨봤더니 4만 7,000원씩 10만 명이면 되더라고요. 법원에 일시불로 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선 이 돈 4만 7,000원부터 내주실 수 있나요? 나머지 9만 9,999명분은 제가 또 틈틈이 보내드리든가 다른 9만 9,999명이 있으시길 희망할 뿐입니다.”
편지의 주인공 배춘환 씨는 “일하는 남편의 아내로서, 애 키우는 엄마로서,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자로서 보낸 돈”이라며 4만 7,000원을 봉투에 넣어 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편지를 읽은 많은 이들이 4만 7,000원과 편지를 보내며 기부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2월엔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잡고”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기구가 출범했다.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생존을 위협받는 노동자와 가족들에 대한 지원모금도 시작됐다. ‘노란 봉투’ 프로젝트다. 2014년 4월 30일까지 4억 7천만 원을 모으는 게 목표였다.
이때 제주도에 사는 가수 이효리 씨가 모금을 대행하는 아름다운재단 사무실로 편지를 보냈다. 그는 손글씨로 직접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지난 몇 년간 해고노동자들의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잘 해결되길 바랄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 뜻과 달리 해석되어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학원비를 아껴 보낸 4만 7,000원, 해고노동자들이 선고받은 손해배상액 47억 원의 10만분의 1, 이렇게 10만 명이 모이면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한 여성의 편지가 너무나 선하고 순수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 편지는 한 시사 주간지에 소개된 뒤 누리꾼(네티즌)의 큰 반향을 얻었다. 그가 편지와 함께 보낸 봉투에는 4만 7,000원이 들어 있었다. 이효리 씨의 편지 이후 모금액은 순식간에 2억 원을 도파했고 2월 22일 현재 모금액은 3억 8,000여만 원, 목표액의 80%를 훌쩍 넘겼다. 이효리 씨는 4만 7,000원이 아니라 100만 원, 혹은 1천만 원도 보낼 수 있을 터였지만 4만 7,000원을 보냈고, 이 부담 없는 금액이 많은 이들의 동참을 불러왔다. 사회적 연대와 참여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이어 노엄 촘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도 아름다운재단 사무실에 ‘노란 봉투 캠페인’ 기부금 47달러를 보내왔다. 영화감독 임순례 씨와 배우 김부선 씨, 만화가 강풀 씨와 주호민 씨, 프로레슬러 김남훈 씨 등 유명인의 동참도 이어졌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우주인 이소연 씨는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50달러를 보내왔다.
시민들의 손길도 계속 이어졌다. 17개월 된 딸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한 시민은 “아이가 완쾌해 살아갈 세상은 더 정의로웠으면 좋겠다”며 모금에 참여했다. 한 6살 어린이는 자신의 전 재산인 2,500원을 봉투에 담에 보냈다. 4만 7,000원어치 우표를 보낸 교도소 수감자도 있었다.
이와 함께 60여 개 출판사의 모임인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도 책을 구매할 때마다 독자와 출판사가 책값에서 470원씩, 모두 940원을 ‘노란 봉투’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0만 명이 4만 7,000원씩 모아 손배와 가압류에 대응하자는 ‘노란 봉투 캠페인’에는 2월 10일부터 111일간 진행된 1~3차 캠페인 기간 동안 시민 4만 7,222명이 참여해 14억 6,869만 원이 모였다(6월 17일 현재).
‘손잡고’의 노란 봉투 캠페인은 국가의 법률적 판단을 거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으로 밀려난 약자들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많은 사람이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전통인 사회적 부조의 미덕을 살려내는 일이자 만해 사상의 21세기적 실천이라 생각된다. 해고노동자들의 실정법 위반 여부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보듬기 위해 자발적 참여로 ‘노란 봉투’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들이 격려와 응원을 받을 만한 이유이다.

2. 수상소감
노란 봉투 캠페인 참여 시민을 대신하여 뜻깊은 상을 주신 데 대해 감사 인사드립니다. 아직 손배 가압류 문제가 진행 중이고 겨우 첫 시작을 했을 뿐인데 큰 상을 주신 것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격려와 지지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세월호가 저 깊은 바닷속으로 잠긴 지 100여 일이 지났습니다. 나라가 큰 슬픔에 잠겼을 때 우리는 그저 가슴을 치며 ‘미안합니다’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차디찬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아이들의 손을 우리는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손가락이 다 부러졌다는 그 절박한 손을 말입니다. 왜 재난은 꼭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더 자주 덮치는 것일까요? 가슴을 치며 ‘가만있지 않겠다’는 때늦은 다짐을 해 봅니다만,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2013년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으로 저물었다면, 2014년 대한민국의 봄은 노란 봉투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들 태권도 학원비를 아껴 쌍용자동차 앞으로 떨어진 손배액 47억의 십만 분의 1인 4만 7천 원을 내놓은 주부 배춘환 씨의 제안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수 이효리 씨가 보내온 손편지와 4만 7천 원은 많은 시민이 참여하게 된 커다란 계기였습니다. 참여하는 시민 서로가 예상 밖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에 놀라며, 연일 모금 목표를 달성하는 기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시민 4만 7,547명이 노란 봉투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보내주셨습니다.
역대 만해대상 중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이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이 영광은 손을 내민 저희 시민들보다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손배가압류 피해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많다며 지원금 신청을 양보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물이 들어오기 직전 그 절박한 순간에 “내 것 입어.” 하고 구명조끼를 양보한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기울어진 한국사회의 복원력입니다. 전복 일보 직전, 위태위태한 한국사회의 무게중심은 밑바닥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은 바로 이분들, 그리고 이들의 손을 잡아준 시민들께로 내려와야 합니다.
만해사상을 기리고 그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애쓰시는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노란 봉투 캠페인에 참여한 저희는 만해 선사의 가르침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구석진 곳으로 찾아가 더 열심히 손잡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노란봉투 참가시민을 대표하여 ‘손잡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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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만해 한용운의 생명 사랑·겨레 사랑·평화 사랑의 큰뜻을 기리고자 제정한 제18회 ‘만해대상’ 각 부문 수상자를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2014년 6월 30일
■ 만해평화대상 :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공동체)
■ 만해실천대상 : 이세중 (변호사)
■ 만해문예대상 : 모흐센 마흐말바프 (이란 영화감독), 아시라프 달리 (이집트 작가) ,
                           윤양희 (서예가, 전각가)
■ 특별상 : 손잡고 (노란봉투 캠페인 동참 시민들) 
- 시상식
: 2014년 8월 12일 오후 3시  ,  강원도 인제군 인제하늘내린센터   
 
만해대상선정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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