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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만해대상에 일면스님, 김성수 주교 등 선정
페툴란 귤렌, WFB, 앱더라힘 엘 알람, 안숙선, 잉고 슐체 콘스탄틴 케드로프 등도 수상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명?평화?겨레 사랑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만해사상실천선양회(총재 자승 스님)가 제정한 만해대상 평화상에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 페툴라 귤렌 터키 평화운동가, WFB(세계불교도우의회)가 선정됐다.

실천부문에는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일면 스님, 모로코의 작가인 앱더라힘 엘 알람, 미얀마의 원로시인 다공 따야가 선정됐으며 문예부문에는 안숙선 국악인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독일의 소설가 잉고 슐체, 러시아 시인 콘스탄틴 케드로프가 각각 선정됐다.

평화부문 수상자인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는 1974년 국내 첫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성 베드로학교’ 교장부임을 시작으로 외롭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매진해왔다. 특히 은퇴한 후에도 고향인 인천 강화에 정신지체장애인 재활시설인 ‘우리마을’에서 ‘촌장’으로 생활하는 등 ‘평생 동안 우리사회에 평화의 씨앗을 뿌려온 성직자’로 알려져 왔다.

평화부문 공동수상자 페툴라 귤렌은 이슬람교 사상가로서 과학과 종교간 대화를 진행하고 있으며 바티칸과 유대교 단체와의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또 터키 300여개 학교를 비롯해 1000여개 학교의 학생 200만명에게 장학금을 수요하는 ‘귤렌운동’을 주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영국 ‘프로스펙트’지와 미국 ‘포린 폴리시’지 선정 ‘2008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WFB(세계불교도우의회)는 1950년 창설된 세계불교도 유일의 연대기구다. 2년마다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26차에 걸친 세계대회를 개최, 불교도의 연대와 단결을 통한 불교적 평화운동을 주도해왔다.

실천부문 수상자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일면 스님은 생소하던 장기이식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와 인식 확산을 주도해온 공헌을 인정받았다. 현재 생명나눔실천본부에는 12만명 회원이 등록돼있으며 장기기증희망등록자는 2012년 현재 3만3000여명이다. 또 치료비 마련의 어려움을 수술 등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한 지원사업도 펼쳐왔다.

실천부문 공동수상자인 앱더라힘 엘 알람은 모로코작가연합 수장으로 다수의 문화?문학 관련 대화포럼을 개최해온 모로코의 대표 문인이자 학자이며 다공 따야는 미얀마에서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는 혁명적 원로시인 겸 소설가다.

문예부문 수상자 안숙선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는 ‘국악계의 프리마돈나’라는 수식어로 불리며 ‘남원춘향제 전국명창 경연대회 대통령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하는 등 국악을 국내외에 알리는데 이바지한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문예부문 공동수상자 콘스탄틴 케도로프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철학자로 ‘시인들’이라는 시전문지를 창간해 현재까지 발행편집자로 활동해오고 있다.

잉고 슐체는 동독과 서독생활을 바탕으로 독일통일 과정과 통일 후 발생한 인간?사회문제를 진단한 독일 소설가다.

‘2013 만해대상’의 총상금은 2억7000만원이며 시상식은 8월11일 오후 2시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2013 제17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성명 : 페툴라 귤렌(Fethullah Gulen)
나이 : 1941년생 (73세)
국적 : 터키공화국
현직 : 터키의 사상가이자 교육 운동가, 평화운동가.


“관대해져라. 바다같이 넓은 가슴을 가져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영감을 받아라. 어려움에 처한 영혼이 없도록 손을 내밀고 관심을 가져라.”

페트라 귤렌은 터키의 학자이자 사상가이며 교육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이다. 1941년 터키 에주룸 주 코루쿡 마을에서 태어난 귤렌은 이슬람교의 사상가로서 자신의 신념을 펴기 위해서 과학과 종교간 대화를 진행하고 있으며 바티칸과 유대교 단체와도 대화를 주도하고 있다. 때문에 영어권 미디어에서는그를 터키와 현대 이슬람세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이슬람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귤렌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할 점은 이른바 ‘귤렌운동’으로 불리는 교육활동이다. 귤렌운동이란 국경을 초월한 종교 사회 정치운동으로서 터키와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 많은 지지자가 있다. 이 운동의 주된 활동은 교육을 통한 평화운동이다. 후원자는 전 세계를 망라해서 수백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학생, 교사, 비즈니스 맨,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다. 2009년 <뉴스위크>는 귤렌이 이 운동을 통해 2백만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으며, 터키에 있는 300여개의 학교와 전세계 1,000여 곳의 학교에 장학금을 줬다고 소개했다.

귤렌은 설교를 통해 ‘물리학, 수학, 화학을 공부하는 것이 신을 숭배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터키에 있는 귤렌학교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데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며 성차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귤렌의 활동 중에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오늘날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종교 간의 폭력과 테러, 자살공격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첫 번째 무슬림 학자였으며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에 이를 규탄하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인류애와 종교적 관점에서 테러와 자살공격을 규탄하는 이슬람의 시각을 담은 책을 출간했으며, 서구 독자뿐 아니라 무슬림들에게도 이와 같은 입장을 전하고 있다. 터키의 수많은 국내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 일본, 케냐,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이유로 테러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9.11 테러 이후 1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귤렌은 서로 다른 종교간, 서로 다른 문화간 대화를 활발히 시도해 왔다. 터키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 정교, 가톨릭, 유대교 등 다양한 소수 종교들을 인정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가 형성되도록 노력해 왔다. 또 해외에서는 종교 간 대화에 대한 그의 생각에 영감을 받아 서로 다른 종교간 상호 이해, 공감, 평화적 공존과 협동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한 많은 조직들이 설립됐다. 대화와 관용에 대한 그의 노력들이 관심을 받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제 264대 로마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와 이스라엘의 세파르디회 최고 랍비인 엘리야후 박시 도론 그리고 다른 종파들의 대표들과의 만남과 화합으로 유명하다.

인류에 관한 모든 이슈들에 대한 그의 사랑, 동정심, 열린 마음 때문에 그는 ‘현대의 루미’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루미의 후손이자 최근의 수피교 대표였던 ?efik Can으로부터 루미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책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으며, 1999년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루미포럼의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페툴라 귤렌이 집필한 수피즘에 대한 두 권의 책은 대학 과정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귤렌의 이러한 활동에 동의하는 추종자들은 그의 사상을 널리 확산하기 위해 활발한 미디어활동을 펴고 있다. 터키어 TV 방송국인 삼만욜루 TV와 메탑 TV, 미국에 영어 Ebru TV, 터키어 신문 자만, 영자신문 오늘의 자만, 잡지와 악시욘, 시진티, 예니 우미트 저널, 영어잡지 The Fountain Magazine, 아랍어 히라 잡지와 국제미디어 그룹 기한과 부루스 FM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다.

현재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자진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들이 서로 적대하지 않으며 대화를 통한 이해와 공공선(公共善; Common Good)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프로스펙트》지와 미국의《포린 폴리시》지는 2005년과 2008년에 독자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하여 현재 생존 중인 지식인들 중에서 세계 100대 지식인(Top 100 Public Intellectuals)을 선정하였는데, 귤렌은 2008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제1위로 선정됐다.



2013 제17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성명 : 김성수(金成洙)
나이 : 1930년생 (83세)
국적 : 대한민국
현직 : 대한성공회 주교


김성수(83) 대한성공회 주교는 평생 우리 사회에 평화의 씨앗을 뿌려온 성직자이다. 그는 1974년 국내 첫 지적장애인 특수학교인 성 베드로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것을 시작으로 성직의 높고 낮음을 떠나 외롭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열정으로 평생을 봉사했으며 은퇴한 후에도 고향인 인천 강화 길상면 온수리에서 정신지체장애인 재활시설인 ‘우리 마을’에서 ‘촌장(村長)’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김 주교는 1930년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서 성공회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배재중, 단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신학과와 성공회 성미가엘 신학원, 그리고 영국 셀리오크 신학대를 수료했다.

김 주교의 시선은 늘 어려운 이웃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김 주교는 ‘어머니는 거지들이 찾아오면 문전박대하지 않고 항시 먹을 것이나 옷가지를 나눠주는 것’을 보고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김주교에게 체화된 것이다.

신학생시절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 현장에 ‘위장취업’도 했던 그는 1964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는 사제서품 후 교회목회 10년, 성베드로 학교 운영 10년, 성공회 주교 10년 등 30여년을 교회에서 봉사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성공회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가 맡아온 직책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경실련 고문,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 고문, 사회연대은행 이사장, 푸르메재단 이사장, 한국YMCA 후원회장, 성공회대 총장(연임) 등 모두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사회활동이었다.

특히 그동안 김주교가 실천해온 사회복지와 봉사활동은 그가 왜 한국사회에서 존경받는 종교인인가를 말해준다. 1984년 주교서품을 받고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에 선출된 후 김주교는 후배 사제들을 이끌고 적극적인 사회복지 활동에 나섰다. 1980년대 김홍일 송경용 등 신학생들이 서울 상계동 철거민촌에 들어가 문을 연 ‘나눔의 집’운동, 외국인노동자들의 쉼터인 경기도 마석 ‘샬롬의 집’ 등이 모두 김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던 시절, 그의 후원 아래 본격화됐다. ‘나눔의 집’은 야학을 시작으로 탁아소, 마을문고, 초중고교생 공부방까지 확대되고 서울교구 내 7곳으로 확산되었으며 서울지역 대한성공회의 대표적 사회봉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샬롬의 집’도 과거 성공회가 기증한 땅을 바탕으로 한센인들이 양계장을 운영하던 곳에서 현재는 가구단지로 변신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으로 변했다.

김 주교가 현재 ‘촌장’으로 일하는 ‘우리 마을’은 2000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1~3급 정신지체 장애인이 일하고 생활하는 직업 재활시설이다. 하루 2500봉지의 콩나물, 고추, 버섯을 키워 ‘강화도 우리 마을’ 브랜드로 납품한다. 전기부품도 조립한다. 김 주교는 ‘촌장(村長)’이라 쓰인 모자를 쓰고 작업을 독려하고 직접 일도 한다.

‘우리 마을’은 김 주교가 유산으로 받은 고향 땅 3000평을 기증해서 시작됐다. 그는 이곳에 장애인 재활시설을 세우기 위해 1998년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에서 직접 커피를 판매해 건립자금을 마련했다. 그가 ‘우리 마을’ 설립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장애인에게는 일하는 것이 최고의 복지’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 사업도 처음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무리 고향이라 해도 장애인시설을 반기지 않는 것이 세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민들은 김주교의 사업계획을 다른 곳처럼 극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김 주교 집안이 과거부터 인근 주민들에게 운동장을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연대의식에 크게 작용한 덕분이었다. 그는 ‘우리 마을’ 10주년이 되던 2010년엔 길상면민들이 주는 ‘제1회 길상인상’을 받기도 했다. 김 주교는 어떤 상보다 이 상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김주교의 봉사적 삶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영국 선교사 출신 부인 김후리다 여사다. 김후리다 여사는 1973년부터 장애아 조기교육과 장애아를 위한 장난감 도서관 설립 등의 공로로 1999년 영국 왕실이 주는 사회공로상과 2002년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이 주는 제7회 우경복지상, 2005년 제13회 세계성령봉사상 등을 수상했다.

그녀는 신혼시절 한 때 한국문화와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강화 전등사 작은 방에 김주교와 함께 머문 적도 있다.



2013 제17회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단체명 : WFB(세계불교도우의회)
창 설 : 1950년
본부소재: 타일랜드


WFB(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세계불교도우의회)는 1950년 창설된 세계불교도의 유일한 연대기구이다. 그동안 2년마다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26차에 걸친 세계대회를 개최하며 불교도의 연대와 단결을 통해 불교적 평화운동을 주도해왔다.

WFB는 1950(불기2493)년 5월 25일 스리랑카의 당시 수도였던 콜롬보에서 창립총회를 가짐으로써 설립됐다. 당시 이 모임에는 테라와다(Theravada, 上座部), 마하야나(大乘)와 바즈라야나(金剛乘, 티베트 전통)가 중심이 된 아시아 유럽과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 등 27개국 대표 200여명이 참석했다.

현재 WFB는 세계 60개 국가에 150여 지역본부와 자매단체인 WFBY(세계불교도청년우의회) 산하에 40여지부가 있으며, 세계불교의 주요단체가 회원단체로 거의 망라되어 가입된 명실상부한 세계불교기구다.

WFB가 대회 때마다 세계를 향해서 내는 목소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평화를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용서와 관용,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회가 끝날 때마다 채택되는 메시지는 분쟁의 원인으로서 인간의 탐욕와 분노와 무지를 지적하고 이의 해결은 상호이해와 자비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를 위해 세계의 불교도는 더욱 강력한 목소리를 내야하며 실천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중생의 실존적 고통을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의 성취에 있다고 할 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이다.

WFB는 세계대회가 열릴 때마다 제1의 과제로 세계평화를 주창하고 대안을 모색했으며 유엔과 유네스코 등 전 세계에 WFB 이름으로 평화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결과 세계의 사람들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과 평등사상이 세계평화를 이루는데 큰 사상적 밑받침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구의 지성들이 불교의 자비사상에서 평화의 원리를 구하는 일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노력은 계속 될 것이다.

WFB가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는 불교도 상호간의 화합과 단결이다. 세계불교연합의 네트워크 강화와 연대활동은 지난 1950년 창설 이래 부단하게 지속되어 왔다. 2,500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는 지역에 따라서 변형된 상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같은 부처님 제자이면서 서로가 불교도라고 긍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테라바다(상좌부) 마하야나(대승) 바즈라야나(금강승)와 동아시아의 불교(중국 한국 일본)는 ‘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서로 전통과 색깔이 너무 달랐다. 그 이질화의 역사는 수천년 동안 계속된 것이었다. 돌아보면 불교는 처음에는 하나의 전통이었던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도 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또 인도 밖으로 전파되면서 지역문화와 융합되고 충돌하면서 다른 모습의 불교로 변형되어 갔다. 인도에서 스리랑카 등 남방으로 옮겨간 테라와다와 일본의 종파 불교와 비교해 보면 이 같은 변화는 너무나 뚜렷하다. 또 남방불교 전통의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승려와 동북아 불교권 선원에서 수행을 하는 선승을 비교해 보면 그 내면의 세계는 그만두고서라도 외형 면이나 수행과 생활방식이 아주 다름을 알게 된다.

주로 경전이나 율장을 암송하는 남방불교의 비구와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동아시아의 불교를 비교해 본다면 아주 다른 종교와 같을 정도로 많은 상이점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전개가 거의 2,500여 년간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인식한 WFB는 창설 이래 우선 이질화되고 변형된 불교의 전통을 한자리에 모아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 왔다. 그 결과 WFB는 그동안 두 가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나는 불교내적인 단결과 상호이해에 의한 화합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평화에 대한 목소리다.

창립대회에서부터 2012년 제26차 한국 대회에 이르기까지 WFB는 세계불교도들의 화해와 협력의 마당 역할을 해왔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이제는 테라바다와 마하야나 그리고 바즈라야나 사이에 막혔던 오해와 불신과 폄하는 이제 사라져 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종파주의에 빠져 있는 일부의 불교도들이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WFB는 이런 각 불교의 전통을 이해와 화합으로써 하나가 되도록 묶는데 그 역할과 기능을 해 왔고, 앞으로도 이런 임무는 더욱 배가 될 것이다.

WFB의 이러한 역할은 불교도만을 위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평화의 가르침인 불교가 스스로 단결과 화합을 통해 그 활동을 제대로 할 때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WFB 창설의 중요한 목적도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WFB는 이제부터 하나하나 실천해가고 있다.



2013 제17회 만해실천대상 수상자
성명 : 황일면(黃日面)
생년 : 1947년생(67세)
국적 ; 대한민국
현직 ;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승려


일면스님은 20여 년 동안 불교의 자비정신과 생명존중사상을 실천하는데 앞장서온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다.

스님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생명나눔실천본부는 보건복지부 장기이식등록기관으로서 장기기증희망등록, 조혈모세포기증희망등록, 환자 치료비 지원, 자살예방센터 운영 등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범사회적인 단체다. 이 단체는 1994년 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법장스님의 주도로 설립되었는데 일면스님은 설립초기부터 이 단체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생명나눔실천본부는 설립초기만 해도 생소하던 장기이식 문제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장기이식이야말로 더 높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인식을 확산하는데 주력해온 단체다. 장기기증을 통해 진정한 자비실천을 하자는 설립취지에 동감한 스님은 법인의 이사로서 누구보다 생명나눔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2005년부터는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장기기증운동을 선두에서 이끌며 함께 사는 행복한 세상 만들기에 진력해 왔다.

스님은 장기기증 확산운동을 활성화하기 거의 모든 시간을 이 운동에 할해하고 있다.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 같은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생명나눔의 필요성을 설법하고 전국사찰을 방문하여 불자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생명나눔실천본부에는 12만여 명의 회원이 등록하였으며 핵심사업인 장기기증희망등록자는 매년 증가하여 2012년 기준 32,814명을 보건복지부에 등록하였다. 이중 207명이 말기질환자에게 실제로 장기를 기증을 함으로써 새로운 삶과 꿈을 심어 주었다.

생명나눔실천본부는 또 2004년부터 백혈병 환자에게 새 생명의 기회를 주는 사업으로 조혈모세포기증 희망등록을 추진해 총 30,216명을 보건복지부에 등록하였으며, 실기증 결연자는 135명에 달하고 있다.

스님은 이사장 취임 이후 우리 사회에 치료비 마련의 어려움으로 입원이나 수술 등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돕기 위한 지원사업을 꾸준히 확대해왔다. 그동안 혜택을 받은 환자는 552명이며 이들에게 지원된 금액은 24억 6천만 원에 이른다. 이밖에도 최근 사회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자살예방을 위해 2011년 6월부터 자살예방센터를 운영해오고 있다. 이 센터는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상담과 면접상담,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을 대상으로 순회교육을 실시했다. 자살충동을 느낀 8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 따듯한 상담과 체계적인 위기관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성과는 생명나눔이란 장기기증 사업뿐만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사업영역으로 정하고 활발한 활동을 해온 결과라 할 것이다.

스님은 특히 이 사업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사업기반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10억여원의 자금을 조달하여 사무실 개선사업과 부산, 대구, 경남, 제주도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본부 개소를 확대해왔다.

스님이 이러한 활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생명이 고통 없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자비심 때문이다. 일찍이 1959년 합천 해인사에서 명허화상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해인사 불교전문강원, 동국대 승가학과 등에서 수학하면서 불교사상의 본질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동체대비의 가르침을 배웠다. 특히 양주 흥국사 봉선사 불암사 등 경기도 일원 사찰의 주지를 하면서 동체대비란 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비정신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설법과 구호활동 등에 나섰다. 군 포교를 위해 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 초대 교구장(2005~2009년) 재임기간 동안 46개 군 법당 중창불사와 14개 군 법당 신축, 40만 명의 군 장병 대상 수계식, 78억 원의 군 포교 기금마련 등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것은 이러한 원력의 결과였다. 또 교육과 복지사업에도 열성을 다해 헌신했다. 스님이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기관과 단체는 광동학원(중고등학교 3개교), 일면 및 해인장학회, 송산실버문화센터 등이다. 스님은 이러한 생명나눔과 자비실천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에 처음으로 제정된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에서 ‘생명나눔“ 분야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도 제8회 대원상, 제22회 포교대상 공로상과 대한적십자 박애장 금장 등을 수상한바 있다.



2013 제17회 만해실천대상 수상자
성명 : 앱더라힘 엘 알람(Abderrahim El Allam)
나이 : 1963년생(51세)
국적 : 모로코
현직 : 작가이자 학자, 문학 비평가


엘 알람은 모로코의 작가이자 학자, 문학 비평가다. 라바트에 있는 무함마드 5대학(Mohammad V University)에서 현대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문화 담론과 문학비평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쓴 글은 <모로코 소설에 나타난 모더니즘에 대한 질문들> <근대 아랍 서사방식에 대한 연구> <시인은 죽지 않았다> 등 의 제목에서 보듯이 모로코 및 아랍 소설에 나타난 문화담론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언어와 문학 분야에 관한 학생 연구자들의 모임'이라는 모로코 학생 문화 단체를 결성해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 단체의 영향으로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비슷한 학생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초기 언론사 재직 시절에도 문학 비평에 매료돼 모로코 및 아랍의 작가, 비평가, 사상가들을 모아 문화대화를 열고 독자들에게 이들의 생각, 작품 등을 소개했다.

이후 작가와 비평가의 길을 걸으며 현대 아랍 문학 비평분야에서 '나레이터(화자)'라는 개념을 거의 처음으로 도입했다.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나기브 마푸즈(Naguib Mahfouz)의 작품에 대한 그의 비평('누가 이야기하는가? 소설 '거울'의 화자에 대한 분석')은 나기브 마푸즈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발행된 아랍 비평 시리즈에 첫 번째로 포함된 아랍어 비평서다.

문학의 사회화, 구조적 접근, 문화 비평, 주제 비평 등 현대 서구 방법론과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이론과 접근법을 통해 아랍과 서구의 문학 작품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도시와 시골의 변화, 조국과 타국, 남성과 여성의 지위, 계층 간 갈등, 존재에 대한 물음, 청년들의 이야기, 세대 간 갈등, 사랑, 전쟁, 자유, 사회 정의, 아랍 사회에 퍼져 있는 부정적인 행동과 가치들 등 현대 아랍 문학에서 발견되는 현상, 이슈, 주제들을 정교하게 조사하고 분석한다. 특히 인도주의적, 감성적, 정신적 내용을 주제로 다루는 문학 장르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과거와 현대 문화잡지에 관심이 있는 아랍계 연구자 중 한 명으로, 모로코와 동양의 매거진을 비교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 외에도 아랍 문학과 문인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인권, 문명화, 문화 간 관용 및 대화 등의 분야에서 아랍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20명 이상의 아랍지역 및 외국 문인, 지식인들에 관한 책에 대한 집필 활동을 지휘해 대중들에게 소개해 왔다. 책으로 소개된 인물들로는 아랍 시인 다르위시(Mohammed Darwish), 시리아 소설가 한나 미나(Hanna Mina), 프랑스 철학자 로제 가로디(Roger Garaudy)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모로코, 이집트, 레바논, 쿠웨이트에서 발간됐으며, 여러 문화잡지, 책들에도 번역되어 실렸다.

그는 집필 및 연구뿐만 아니라 독서 장려 활동에도 앞장서 왔다. 모로코 철도청과 협력해 "책 읽는 기차(The Train of Reading)"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전국 각지의 기차역에서 책을 승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열차 승객들의 독서를 장려하고, 문화, 문학과 사유의 세계를 즐기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문학계에의 기여도와 공로를 인정받아 작가들로부터 신망이 높으며, 모로코 도서상, 카이로 아랍문학상, 모로코 청년 작가상, 모하마드 제프자프(Mohammed Zefzaf) 아랍어 소설상 등 많은 주요 모로코 및 아랍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또 2009년부터 모로코 문화부 산하조직이자 6,000여 회원이 있는 모로코작가연합 회장을 맡고 있고, 지난 해 연임에 성공하며 리더십도 인정받았다. 모로코 작가연합 회장으로서 이라크, 요르단, 오만, 튀니지, 팔레스타인, 아제르바이잔 등 아랍권 및 한국, 중국 등 권역을 넘어선 타 국가들과의 문화 교류, 작가들과의 깊이있는 대화의 진전, 관용, 평화 등의 이슈를 포함한 문화 간 대화와 교류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모로코와 아랍 세계에서 영향력있는 문화 잡지인 AFAQ의 책임자를 맡아 형식적, 질적 성장을 이루어냈으며, 쿠웨이트 알 아라비 매거진의 모로코지부장을 맡아 아랍 문화에 관한 다수의 컨퍼런스에도 참여하고 있다. 모로코 문학의 전파를 위해 모로코 국내 및 해외에 활발하게 글을 기고해 왔다. 아랍과 유럽 국가에서 주최하는 다수의 국내외 포럼에 모로코 대표로 참여하고 모로코작가연합 수장으로서 다수의 문화, 문학 관련 대화포럼을 개최한 모로코의 대표 문인이자 학자이다.



2013 제17회 만해실천대상 수상자
성명 : 다공 따야(Dagon Taryar)
나이 : 1919년생(95세)
국적 : 미얀마
현직 : 혁명적인 원로시인 겸 소설가


미얀마(버마)에서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는 다공 따야(Dagon Taryar)는 혁명적인 원로시인 겸 소설가이다. 1919년 미얀마 북부지역 몽주의 짜이락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 시절엔 매우 적극적으로 문학과 사회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일본 식민지 시절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과 네 살 차이지만 절친한 동료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이후 군부정권이 들어서자 반정부운동과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참여하는 등 재야세력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전국적 청년학생조직인 ‘예이난메이’ 단체의 조직부장을 맡아 군부정권의 막강한 저항세력으로 발전시켰으며, 이 단체는 버마민주화운동의 핵심조직으로 아직도 소수민족의 근거지에 따라 간혹 정부군과 대치하면서 내전을 일으키고 있는 학생 민병대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1934년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식민지시절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 ‘토템시’에 관심을 갖고 작품을 썼다. 1948년 우누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때 표현의 자유가 잠깐 열렸는데, 이때에 문학동인을 결성하여 창작과 연구활동을 활발히 했다. 당시 <따야>라는 문학잡지의 제작자와 편집장을 맡았는데, 여기에 창작시와 시대적 상황을 기록한 산문 등을 발표하였다. 이 때 아웅산 장군도 이 잡지에 에세이와 칼럼 등을 상당히 발표했다. 외세 침략세력과 맞서 싸운 독립활동가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던 시절 대체로 그의 작품 경향은 리얼리즘이나 민족주의 형태를 띠었다. 당시 식민지 전후공간에서 미얀마(버마) 민족문학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작가들 상당수가 이미 작고하였으나, 유일하게 현재 활동하는 작가로서는 다공 따야 뿐이다. 그는 아직도 식민지 시대 이후 이어진 군부정권에 고통 받고 있는 버마인들의 현실과 그 상처를 자신의 시와 소설작품에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얀마(버마) 문학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이는 다공 따야에 의해 주도된 ‘새로운 문학’이란 의미의 ‘사 페 띠sar pe thit’문학 운동이다. 당시 ‘사 페 팃’운동에 참가한 작가들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국내외의 평화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도 창작활동과 사회운동을 병행하면서 <오예지><간다우저널> 등의 편집장과 버마작가회 회장을 맡아 미얀마(버마) 문학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구십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 세 번의 정권이 바뀌는 동안 문학을 통한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작품으로서 자신만의 사유를 담아내기도 했던 다공 따야는 미얀마의 어두운 현실을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다공 따야가 평생 관심을 가진 분야는 문학과 미얀마 민주화다. 그는 자신의 문학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평화라는 단어는 지워버릴 수 없는 주제라고 강조한다. 1947년 아웅 산 장군이 암살되기 전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웅산’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존경하는 독립영웅에 대해서 쓴 이 비판적인 에세이는 많은 미얀마 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이 글이 발표되었을 때 웃었다고 한다. 건설적 비판은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주며 나라의 진보를 가져 온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는 1962년 군사정부에 의해서 4년간 투옥된바있다. 한때는 정부로부터 고위직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 독재자 네 윈 장군이 수여 하는 국가에서 주는 상을 거절했다. 그 후 그는 수도 랭군으로부터 자진 망명하였다. 옛날 왕들이 귀양을 보냈던 매자란 곳을 택했다. 그는 스스로 해방자라고 불렀지만, 정당이나 정부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1988년 미얀마 민중봉기 때, 많은 작가들이 그들의 불만을 고도의 추상적이고 기교를 부려 표현해지만, 다공 따야는 아주 중요한 시 “The Thaw(해빙)” 을 썼다. 국제정치 기상에 변화를 바란다는 의미의 시였다.

다공 따야는 1990년대 중반 전 공산주의자들과 네 윈 사회주의 프로그램정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는 작가란 국민들과 사회 환경과의 접촉을 잃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신들은 예술을 사회 정치 환경으로 부터 분리하면 안 된다”고 썼다. 2004년에 그는 미얀마의 정치적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정당들의 최대관심사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언제든지 군사정부와 재야그룹과의 사이에서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원수가 없다. 오직 친구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정치는 원수를 친구로 만든다는 뜻이다.” 라고 말했다.



2013 제17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성명 : 콘스탄틴 케드로프(Konstantin Kedrov)
나이 : 1942년생(72세)
국적 : 러시아
현직 : 러시아 시인, 철학자


콘스탄틴 케도로프는 현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1960년 타타르공화국의 카잔시 제68고교를 졸업한 그는 고교시절 청소년문예지 <타타르 청년동맹>지에 ‘자유’라는 제목으로 데뷔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창작활동에 전념해오고 있다. 모스크바의 고리끼문학대와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러시아문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고리끼문학대학교에서 12년간 러시아문학을 강의했으며, 1995년에는 <시인들>이라는 시전문지를 창간하여 현재까지 발행편집자로 활동해 오고 있다.

케도로프는 카잔대학 재학시절부터 문예사조의 하나인 ‘미래파-풋툴리즘’을 러시아 문단에 소개한 예세닌과 국민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세계에 심취했다. 후루시쵸프 정권시절에는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시들을 발표하면서 제적을 당하기도 했다.그는 대표적 저항시인 「앵무새」로 인해 소비에트 비밀경찰 조직인 KGB의 무차별적인 고문과 박해를 받은 나머지 자살기도까지 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후르시쵸프의 실각과 함께 복권되어 사회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1989년 케도로프는 첫 시집이기도 한 모노그래프 창작시집「시적인 우주」를 출간 했다. 작품의 전반적 성격은 반체제적이었다. 그 내용 중 ‘을 뚜렷이 기억하고 일침을 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구절로 인해 약 2만부가 출간과 동시에 KGB에 의해 몰수 되었다. 그러나 몰수가 시작되기 직전 책이 출간되어 각 서점에 배포된 지 40여분 만에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인 <돔 크니기>에서만 700부가 판매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그의 대표작 ‘사랑의 컴퓨터’가 실린 시집『사랑의 컴퓨터』가 출판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집은 현재까지 세계 곳곳의 잡지와 매체에 소개되고 있다. 1996년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이후 영문과 불문으로 출간되기도 했고 이탈리아, 스페인, 중국, 네덜란드 등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2003년 미국의 CNN방송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콘스탄틴 케도로프를 예상하며 심층취재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상파방송들도 노벨상문학상 후보자로서 심층보도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주요 보도매체로 , , , 등이 있었으며, 범유럽 문예주간지 <유럽 엑스프레스>에서는 ‘노벨로 가는 메타-메타포라 혹은 메타-노벨로 가는 메타-메타포라?’라는 타이틀로 특집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케도로프는 2001년 희곡작품 <소크라테스의 헌사>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러시아의 연출가 유리 류비모프에 의해 그리스 아테네와 델피에서 성황리에 공연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감각과 기법을 통해 독자적인 시 창작활동을 하는가 하면, 희곡, 영상, 그림 등의 인접예술을 도입 시의 표현영역을 극대화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기여를 해온 시인이다.

이어 그는 2002년 시선집『또는』을 출간했다. 소비에트시대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당시 노벨문학상 후보자로도 올랐던 바즈네센스키가 서문을 썼다. 이 책은 현재까지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도서관의 권장도서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2009년엔 러시아 국영출판사 <순수문학>에서 “러시아문학의 노벨상후보자”라는 시리즈물로 콘스탄틴 케도로프 작품집을 두 권 출간했는데, 제목은 제1집이『고요의 지휘자』, 제2집은『문학의 철학』이었다. 최근에도 자작시를 모노그라피와 영상시를 제작 유튜브 등에 발표하는가 하면, <시인들>이라는 시전문 잡지에도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시인으로 유럽의 작가들과 비평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이 밖에 해외활동으로 1988년 이후 3회에 걸쳐 핀란드와 프랑스에서 열렸던 <아방가르드 축제>에 초청강사로 참가했는가 하면, 2000년 러시아, 프랑스 대표시인들의 공동시선집 <시의 날>을 출간했고, 2001년 그리스에서 개최된 <소크라테스 심포지움>에 초청 발표자로 참여했으며, 20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시인>학회에 초청되어 참가했다.

케도로프는 2003년과 2005년엔「사랑의 컴퓨터」가 GRMMY.ru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시>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문예주간지 <러시아문학>에서 주관하는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 2010년 모스크바작가협회와 러시아 번역가협회가 공동주관한 <올해의 그리바에도프>상을 수상했고, 2011년 러시아 정보통신부로부터 E-book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오픈 북>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우크라이나 시인 스코보로드를 기리는 국제학술상인 <예술에 있어서의 인문주의>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12월 러시아 정부에서는 콘스탄틴 케도로프에게 ‘뛰어난 문화인자격증’과 문화예술인연금 수혜자로 선정하여 국가적 대표시인으로 대우하고 있다.



2013 제17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성명 : 잉고 슐체 (Ingo Schulze)
나이 : 1962년생(51세)
국적 : 독일
현직 : 소설가


잉고 슐체는 동독과 서독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통일 과정과 통일 후에 발생한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가장 적절히 파악하고 진단한 저명한 독일 소설가이다. 20세기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양철북'의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는 잉고 슐체야 말로 이 시대의 ‘대단한 서사작가’라고 극찬했다.

동서독 통일과정과 통일 후의 변화모습을 주제로 삼고 있는 잉고 슐체의 문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 서너 가지다.

첫째 그의 소설은 그동안 분단으로 인해 숙명적으로 제약 받을 수밖에 없었던 서독이나 동독의 어느 한쪽으로의 편향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과거 동독이나 서독의 체제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통일을 통해 재구성된 새로운 사회와 인간들을 주목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통일 후에 발생한 새로운 사회문제들 및 이에 따른 인간심리 변화 등을 소설화함에 있어서 주제가 태생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무거움에 억눌리지 않고 ‘물방울 속에서 세상을 보는 행위’처럼 잉고 슐체만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예술성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잉고 슐체는 19세기와 20세기의 다양한 소설기법을 터득해서 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문학의 장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와의 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소설기법을 통해 심각하고 민감한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인간적 사건 혹은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셋째는 문학의 주제가 대부분 독일분단 및 독일 통일 등, 작가 자신의 조국 현실에 집중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인 작업을 위해 외국의 언어, 특성, 삶의 양식 등 외국문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열린 사고방식은 세계화 시대가 요구하는 상호 문화 커뮤니케이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잉고 슐체는 1962년 구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1962년은 베를린 장벽 설치로 인해 독일분단이 고착화되기 시작한 바로 다음 해이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에 붕괴되었고, 1990년 10월 독일은 공식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이 당시 잉고 슐체의 나이는 28세였다. 물리학 교수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독 인민군대에서 군복무를 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예나대학교에서 서양고전어문학(고대 그리스어, 라틴어)을 전공했고 독문학과 예술사를 부전공 했다. 대학 졸업 후 1990년까지 알텐부르크 주립극장의 ‘드라마두르그(공연 기획자)’로 활동했고, 1992년까지 신문사 편집인으로 근무했다. 1993년 전반기 6개월 동안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언론인으로 활동한 다음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데뷔작은 1995년 러시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33개의 행복한 순간들'이다. 1998년에는 ‘동독 지방의 소설’이라는 부제의 '심플 스토리들 Simple Storys'을 발표했다. 통일 된 직후 구동독 지방 한 작은 마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2005년에는 '새로운 인생'을 발표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유년시절의 친구, 누이동생, 이룰 수 없었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통해 동독에서의 생활과 통일과정의 전환기를 묘사하고 있다. 소설속의 편지들은 통일되던 해인 1990년 전반기에 써진 것으로 동독이 붕괴되던 시절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를 기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7 년에는 소설 '핸드폰'을 발표했다. 작가는 예리한 관찰력과 언어의 정확성으로 핸드폰을 통해 무서운 속력으로 변화해가는 인간들과 사회를 추적하고 있다.

2008년에는 '아담과 에벨린 Adam und Evelyn'을 발표했다. 소설 속에서 여인들은 소설의 주인공인 아담을 사랑한다. 재단사인 아담이 만드는 옷을 입으면 아름답고 품위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 역시 그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아름다워진 여인들을 사랑한다. 아담이 살고 있는 곳은 지상낙원이다. 하지만 그의 애인은 지상낙원을 버리고 새로운 낙원인 서독을 향해 도망의 길을 떠난다. 애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담은 그녀의 뒤를 쫓아가고, 마침내 서독에 도착한 다음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듣는다. 서독으로의 탈출은 이브의 유혹이었다. 낙원이라고 선전했던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와 새로운 낙원인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밝혀낸 소설이다.

잉고 슐체의 작품들은 전환의 시기에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독일통일의 과정과 통일 후의 문제를 소설을 통해 극명하게 제시함으로써 문학이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제시한다.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소설들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2013 제17회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성명 : 안숙선(安淑善)
나이 : 1949년생(64세)
국적 : 대한민국
현직 : 국악인,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안숙선은 어릴 때 별명이 ‘남원의 아기 명창’이다. 아홉 살 때 가야금 명인이자 이모인 강순영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그 뒤에 이모의 손을 잡고 명인 주광덕에게 찾아가 판소리 기초와 단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안숙선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방법은 가야금을 퉁길 때는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판소리를 할 때는 ‘목이 찢어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안숙선은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히 외가가 ‘국악의 명가’다. 안숙선에게 처음 가야금을 가르친 분이 가야금 명인이자 이모인 강순영이다. 어린이 안숙선의 무릎에 처음 가야금을 놓아주었던 이모는 조카의 손가락에게 피가 날 지경인데도 “너 아프겠다”고 동정하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가르쳐 주기만 했다. 안숙선의 외가 쪽에 대금 산조 예능보유자였던 강백천은 어머니의 사촌이다. 동편제 판소리의 거목 강도근은 외삼촌이다. 1986년 안숙선이 적벽가를 완창했을 때 호탕한 남자 소리를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외삼촌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안숙선은 열아홉 살 때 남원에서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명창 김소희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다. 또 당대의 일인자 박귀희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1997년 마흔아홉 나이에 안숙선은 스승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병창 기능보유자가 됐다. 두 스승은 안숙선을 딸처럼 아꼈다.

안숙선은 효녀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하늘같은 존재로 여겼다. 언제고 심청가를 부를 때면 자신도 부모님을 위해 심청이처럼 자기 몸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사실 안숙선이 국악을 하게 된 것도 힘들었던 시절에 부모님을 도와드리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조금 희생하면서라도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안숙선의 일생을 통해 한 번도 그녀의 머리 속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안숙선은 19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갔다. 누가 봐도 성음이 뛰어났고 연기력도 남달랐다. 이때부터 안숙선은 춘향역과 심청역을 도맡았다. 자연스럽게 안숙선의 이름 뒤에는 ‘영원한 춘향’ 혹은 ‘국악계의 프리 마돈나’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스승의 소리를 직접 귀로 듣고 익혀야 했던 시절에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녹음기’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소극장 지하 보일러실에 내려가 혼자서 연습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연습벌레’다.

1986년부터 1999년 사이에 안숙선은 판소리 다섯 바탕을 국립극장에서 완창했다. 판소리 명창이라면 그 이름에 걸맞게 반드시 갖춰야 할 이력이다. 안숙선은 유럽 일곱 나라를 돌면서 춘향가 완창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고, 아메리카 대륙 일곱 나라에서도 순회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에든버러 축제에 초청을 받아 춘향가를 완창하기도 했다.

안숙선이 살인적인 연습 시간과 공연 일정을 감당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실천하는 체력 관리 덕분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스트레칭, 요가, 등산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그 체력을 바탕으로 쉼없는 연습과 공연, 그리고 후배를 가르치는 일은 해냈던 것은 물론이고, 두 차례에 걸쳐 국립창극단 단장을 맡았고,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직도 해냈다.

소리 대중이 모두다 안숙선을 인정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국악인으로서 갖춰야 할 올곧은 정신에 있다고 할 것이다. 안숙선이 방송에서 국악 관현악단과 협연을 하다가 갑자기 노랫말을 잊어버린 적이 있다. 어떻게 위기를 넘겨보려고 고수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투병 중이었던 스승 김소희 명창이 그걸 봤다. 스승은 나중에 만났을 때 아무 말 없이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들어있었다. “숙선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너의 소리를 인정하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아니라고 하면 그건 아닌 것이란다.”

안숙선은 그날 이후로 ‘만 사람의 환호보다 한 사람을 두려워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산다. 스승은 돌아가셨지만 안숙선은 지금도 마음이 흐트러졌다 생각될 때마다 집에서 스승의 편지를 꺼내 읽는다. 그녀의 인생 모토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라’는 것이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제자들과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 말이 오늘날 우리 국악계의 큰 자리에 명창 안숙선을 우뚝 서 있게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남원춘향제 전국명창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안숙선의 인생에서 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안숙선의 일면을 엿볼 수는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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